장르와 게임이름과 고객 커뮤니케이션

얼마 전에 모바일게임 하나가 출시되어 출시일에 바로 설치해 플레이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이 회사의 게임은 판교에서 가장 잘 나가는 회사 답게 항상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설치를 시작해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할 때까지 여러 요소들은 항상 군더더기없이 잘 연결되어 있었고 이번에도 그런걸 기대했습니다. 사실 이번엔 기대를 완전히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게임 초반부는 좀 삐걱거렸고 ‘어.. 이런 좁은 공간에 이런 카메라를 쓰다니.. 이거 좀만 돌리면 엉망되는데..’ 같은 생각을 하거나 튜토리얼을 다 끝냈는데 아직 나머지 지역 다운로드가 안 끝나 튜토리얼 지역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상한 상태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더 플레이하다가 이 게임은 이 회사에서 만드는 다른 게임과는 달리, 또 이 회사 이외에 다른 회사들이 출시하는 여느 모바일게임과 같이 출시한 것이 아니라 출시 당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커뮤니티를 둘러보니 이 게임은 이미 제가 실망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정신 없이 까이고 있었는데 이 회사의 다른 게임과 너무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조작계, 전투, 과금전략까지 거의 모든 것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대명사 대신 명사로 이야기하자면 제 개인적으로는 여러 게임들이 서로 리니지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세상에서 리니지의 핵심 메커닉을 복제한 게임들이 넘쳐나는 것을 매일같이 지켜보다 보니 어떤 게임이 리니지와 똑같이 생겼거나, 과금 메커닉이 리니지와 비슷하다고 해서 별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B2는 유난히 이 점에 고객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른 게임도 다들 리니지 배끼는데 뭐가 문제일까 싶어 생각해보다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게임 만드는 사람이다보니 리니지를 게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리니지는 장르이자 일종의 종교입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는 지금 이야기할 주제는 아닐 것 같고 장르에 대한 이야기만 해보자면 리니지는 게임 이름이 아니라 장르 이름입니다. 큰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장르. 그래서 많은 게임들이 리니지가 되고싶어하고 다들 ‘순한맛 리니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이미 시장에 널려있고요. 그런데 리니지를 게임 이름으로 접근한 게임들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리니지는 그 메커닉과 고객들에게 유발하는 심리적인 장치 일체를 포함한 장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EA가 지난 오랜 세월에 걸쳐 니드포스피드 브랜드로 게임을 20개 가까이 출시해도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 것처럼, 또 다른 회사들이 - 니드포스피드가 최초의 레이싱 게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 니드포스피드 시리즈의 아이디어를 빌려 레이싱게임을 만들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회사가 리니지의 신작을 만들고, 또 리니지의 시스템을 빌려온 다른 게임을 만들고, 또 다른 회사들이 순한맛 리니지를 만드는 상황이 고객들에게 잘 못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고객들이 리니지라는 게임의 아류작에 실망하는 모습을 보일 때 만약 우리가 리니지를 전설의 바로 그 ‘단일 게임’이 아니라 지난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들에게 희노애락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온 바로 그 ‘장르’로써 커뮤니케이션했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똑같은 메커닉으로 게임을 만들어도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 니드포스피드 시리즈처럼 리니지 역시 장르로 받아들여져 이 장르의 메커닉에 따라 개발한 여러 게임들 역시 문제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메커닉을 사용하는 게임을 만들려면 그 비슷한 게임을 게임이 아니라 장르로써 커뮤니케이션 했어야 했고 여기에 실패한 이상 고객들이 리니지를 장르가 아닌 게임으로 받아들이면서 비슷한 메커닉으로 개발한 게임을 모두를 ‘장르'가 아니라 ‘아류작’으로 받아들여 버린 겁니다.

만약 앞으로도 리니지 장르의 게임을 개발해야만 할 운명인 여러 프로젝트들은 지금부터라도 리니지가 사용하는 메커닉들을 장르적 특징으로써 고객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또 다른 게임이 출시될 때 이번과 같은 평가를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EA가 니드포스피드를 20개씩 발매하고도 별 일 없는 이유를 잘 생각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