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전과 생각의 자유

공성전과 생각의 자유

타임라인에 지나가던 바후발리 공성 클립을 보다가 문득 지금까지 만들던 공성이 너무나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게임에 공성 장면은 대단히 중요하게 등장했습니다. 오래 전 어떤 게임에서는 강력한 제국 에 맞서 저항군이 공성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MMO 게임이었지만 거대한 성 앞에 펼쳐진 넓은 벌판에 놓인 투석기가 성벽을 향해 거대한 돌을 날리고 이 돌이 성벽에 부딪쳐 부서질 뿐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수 많은 병사들이 성벽을 향해 나아가고 또 성벽 위 병사들 하나하나가 화살을 날리는 엄청난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이 가까스로 성벽 위에 올라가 병사와 괴물을 쓰러뜨리고 레버를 돌려 마침내 성벽을 열면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저항군이 성문을 통과해 성 안에 진입해 성 안뜰에서 거대한 싸움을 일으킵니다. 주인공은 이들을 배경으로 성 안에 진입해 제국군의 수장을 처단할 본격적인 준비를 합니다.

또 다른 게임에서는 비슷한 설정으로 저항군이 공성을 하는데 이번에는 비가 내리는 밤중에 공격이 시작됩니다. 거대한 바퀴가 달린 공성탑을 앞으로 밀며 진격하기 시작하는데 쏟아지는 화살에 섞인 불화살 때문에 공성탑에 불이 붙어 공성탑 하나가 무너져 내립니다. 그 안에 탄 사람,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이를 뒤로 하고 주인공이 탄 공성탑은 화염에 휩싸이지만 가까스로 성벽에 다다라 성벽 위에 있던 적들을 쓸어버립니다. 이런 찰나에 공성추가 성문을 공격하는데 주인공은 성벽에서 뛰어내려 성문을 방어하는 병력을 쓸어버리고 비로소 성문이 열리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됩니다. 주인공인 이를 뒤로 하고 제국군의 수장을 처단하기 위해 성 안으로 진입합니다.

이런 장면을 만드는 경험은 고통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 많은 병사들이 진격하고 서로 싸우고 죽는 모습을 높은 프레임레이트를 유지하며 보여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온갖 최적화 기법을 동원해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은 온갖 눈속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바위에 맞아 무너져 내리는 성벽을 곧이곧대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바위가 성벽에 맞으며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는 사이에 무너진 성벽으으로 바꿔치기 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좁은 성문을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충돌해 멋진 장면을 김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카메라는 이들을 조금 멀리서 잡고 성문을 통과할 때 이들의 충돌을 잠깐 꺼서 서로 조금 겹치지만 걸리지는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성문을 통과한 다음에는 충돌을 다시 켜서 주인공이 이들 옆을 지나갈 때는 실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제국군과 저항군 무리가 서로 싸우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지만 그들은 서버에 의해 제어되지 않았습니다. MMO 게임이지만 아예 서버를 거치지 않는 독립적인 연출 시스템을 만들어 컷씬 없이도 그럴듯한 전투를 만들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냈습니다. 시험 버전을 공개할 때 유명한 분이 시연 컴퓨터 앞에서 화면 저 구석구석에 어렴풋이 보이는 병사 하나하나가 각자 전투 하는 모습을 모니터 가까이 들여다 보며 입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과 그 결과는 대단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런 장면은 여느 게임에 기본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서로 접근 방식에 따라 구현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MMO 게임에서는 여간해서 표현하지 않던 대규모 군중과 이들을 포함한 아주 큰 스케일의 공성 전투, 이들을 습격하는 크고 강력한 괴물과 무너져 내리는 성벽, 이들을 배경으로 일당 백의 전투를 벌이는 주인공.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이 장면은 대단했지만 처음 이런 장면이 MMO 게임에 도입될 때 느끼던 감정은 조금씩 줄어들고 다들 비슷한 공성 장면에 식상함은 조금씩 커졌습니다.

최근에는 한 MMO 게임에서 여러 문제로 잘 시도하지 않던 움직이는 발판을 타고 이동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트레일러 영상을 봤는데 이 메커닉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대강 떠오르며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또 그걸 저 멀리 보여주는 장면을 만들 때 개발자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지 짐작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완성될 것은 식상해져 가는 대규모 공성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찰나 맨 처음 소개한 바후발리의 공성 클립을 보고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이 너무 좁은 틀에 갇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저건 영화입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에 비해 더 넓은 상상을 펼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리법칙과 그것에 적당한 수준으로 벗어나는 영화적 허용의 한계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비해 게임은 그보다 더 강한 게임적 허용을 통해 더 대단하고 더 환상적인 것을 보여주고 또 그 안에 직접 뛰어들어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바후발리 공성 클립을 보며 게임적 허용이나 영화적 허용이 다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저 공성은 진짜 끝내줍니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공성의 어느 장치 하나가 대단하지 않을까요. 흔해 빠진 공성탑, 충차, 성문을 향해 이동하는 병력,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비. 이와 비슷하지만 또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다른 투석기, 완전히 다른 진입 방법 등. 영화적 허용보다 게임적 허용이 훨씬 더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고 또 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게임의 강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상 앞에 우리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여러 게임들의 엄청난 공성 장면은 그 장면을 구상하고 그 장면으로 향하는 스토리와 시스템을 만들어 스토리라인의 절정에 그 장면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같은 관점에서 바후발리 같은 훨씬 자유로운 게임적 허용 속에 상상해 낸 클라이맥스를 위한 스토리라인과 게임 시스템은 얼마나 더 대단한 경험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다시 한국식 MMO 게임을 만들 기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기회를 잡는다면 꼭 이런 대단한 공성 장면을 포함한 게임을 좀 더 자유로운 상상 속에 만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