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구하느니 퇴사합니다

족구하느니 퇴사합니다

코비드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농담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무서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변화를 맨몸으로 마주한 분들이 나타났습니다. 분명 코비드는 어느 날 갑자기 쨘! 하고 끝나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 건물 앞에 쳐진 테이프를 끊으며 완전 종식을 선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조심하며 아주 오랜 기간 함께 살아가야 할 겁니다.

물론 코비드가 전 세계에 퍼지며 저 한 명의 관점으로 나쁜 일만 생긴 것은 아닙니다. 일단 운 좋게도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내 얼굴 상태를 이전보다 훨씬 덜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요. 가령 면도는 이틀에 한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으로 바뀌었습니다. 말할 때 내 구취를 관리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일이 되었습니다. 또 이전보다 원격 회의와 문서화가 더 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몸에 열이 있으면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없으니 알아서 서로 떨어져 일하는 상황에 적응했습니다.

또 회식을 잘 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더라도 점심 회식 정도로 규모가 축소되어 늦은 밤 잡히지 않는 택시에 발을 동동 구를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워크샵을 가지 않게 됐습니다. 워크샵 대부분은 그저 그런 싸구려 팬션에 모여 모두 함께 닫힌 공간에서 발냄새를 뿜뿜하며 택시 잡을 걱정 없이 술을 마시고 놀다가 다음 날 아침 살아난 사람부터 주변을 정리하고 안 감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 쓴 채 하나 둘씩 집에 돌아가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평화로운 몇 년을 보내며 특히 워크샵이라는 말을 완전히 잊고 살던 어느 날 갑작스레 워크샵을 가자는 이야기가 회의에 나왔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워크샵 이야기를 꺼낸 분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워크샵을 못 가서 아주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였고 거기에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가서 구석에 반투명으로 앉아 있다가 일찍 자고 다음 날 맨 먼저 살아나 원래 없었던 것 마냥 조용히 사라지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큰 회사에 있을 때 전체 체육대회에서도 그 넓은 운동장 구석 건물의 지하 3층 계단 밑을 발견해 돗자리를 깔고 짱박혀 빈둥거리던 경험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회의 후 본격적으로 워크샵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면서 워크샵 프로그램에 ‘족구’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직전까지는 조용히 짱박혀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었지만 모든 구성원이 반드시 참여하는 족구 프로그램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 있다가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은 제가 족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워크샵에 반투명 상태로 참여하는 건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족구에 참여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먼 옛날에는 전통적으로 워크샵에 가서 족구 같은 팀 대항 스포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먼 옛날에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거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족구 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짐을 내려 정리하고 다른 프로그램 준비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하면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족구 참가자들이 예상대로 다 쓰러져 있어 이후 프로그램 진행이 흐지부지 되곤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으로 프로그램이 진행 되면 반투명 상태로 어디 짱박혀 있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해야 하는 족구는 여러 가지로 나쁩니다. 일단 모든 사람이 구기종목 체육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 가정합니다. 팀 대항 체육 활동을 쉽게 하기 어려운 이유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몸치, 시력이 나쁨, 컨디션 나쁨, 건강 상태가 나쁨, 공을 만져본 적이 없음, 규칙을 모름 등. 일부는 극복할 수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이유도 있어 모든 사람을 참여 시킬 계획을 수립해선 안됩니다. 또 플레이 중 다칠 수 있습니다. 워크샵이 이미 택시 걱정 안하고 술 마시고 노는 일정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최대한 다치지 않고 멀쩡히 돌아와 이후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대 사무직 노동자들은 원활한 팀 대항 스포츠를 수행하며 다치지 않을 만한 충분한 몸놀림을 가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족구 프로그램은 이런 가능성을 무시합니다.

계절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 계획을 수립할 때는 실외 기온이 40도를 넘나드는 시점이었는데 밖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상황이어서 족구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습니다. 또 이후 프로그램 진행에 큰 영향을 줍니다. 앞에 농담처럼 말했지만 체육 활동 후에는 다들 지쳐서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할 의지가 사라지곤 합니다. 이후 프로그램이 흐지부지되고 바로 술판으로 바뀝니다. 이걸 아예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년 만의 워크샵이라면 최소한의 의미 있는 프로그램은 진행 되어야 했습니다.

이 계획이 계속해서 실행되도록 보고만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진심으로 족구하면 즉시 퇴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평범한 개인의 대체가능성에서 우리들 모두는 대체 가능하므로 함부로 대체불가능성에 기반해 협상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이판사판이었습니다. 결국 여러 다른 이유로 족구 프로그램이 취소되었고 워크샵 내내 어느 정도 반투명 상태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족구 프로그램을 제안했을 누군가의 얕디 얕은 생각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뒷맛이 씁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