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해킹 키보드는 윈도우 환경에서 오히려 강력해요

학교 졸업하고 나서 일하기 시작한 첫 해에는 회사에서 지급해 준 키보드를 별 불만 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그래머 한 분이 사용하시는 키보드를 봤는데 여러 모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단 회사에서 지급해 준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키보드에도 개인의 취향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오른쪽 숫자 키패드나 펑션 키 배열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그 키보드가 뭔지 알아보니 해피해킹 키보드 프로페셔널이라는 키보드였는데 그 때 내 월급으로는 정말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큰 맘 먹고 키보드를 주문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같은 키보드를 계속해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 와서 이런 배열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 이 배열 때문에 이보다 키가 더 많은 키보드를 사용할 때 너무 번잡하고 복잡하고 또 손을 너무 많이 움직여야 해서 힘들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 키보드는 원래 방향키를 쓸 일이 거의 없는 터미널 환경에서 주로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른 키보드에 비해 키 수가 적은 특징과 터미널 환경이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윈도우 환경이나 엑셀 같은 오피스 앱 사용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키보드를 사용해 오면서 유일하게 곤란했던 순간은 키보드를 샀던 첫 번째 직장을 그만 두고 두 번째 직장에 출근했을 때 팀에서 카트라이더 할 때 뿐이었습니다. 상하좌우 방향키로 조작해야 했는데 이 키보드로는 방향키 각각을 펑션키 조합으로 입력할 수는 있었지만 민첩하게 입력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용 사례를 제외한 나머지 상황에서는 알려진 것 만큼 윈도우 환경이나 오피스 앱에 사용하기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 키보드 이야기를 하면 자주 나오는 일종의 미신을 좀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키보드에는 오른 편에 숫자 키패드가 없는데 흔히 숫자 키패드가 없으면 숫자를 민첩하게 입력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어 키패드 없는 키보드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에게 겁을 주곤 합니다. 실은 은행 처럼 아예 본격적으로 숫자를 수동으로 입력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숫자를 많이 입력할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엑셀을 사용할 때도 작업 대부분은 워크시트를 가공하고 계산 과정을 입력하고 수식을 만들거나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작업이 대부분이고 숫자를 직접 키패드를 타이핑 해서 입력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음으로 첫 번째 줄이 펑션 키가 아니라 숫자 키가 배치되어 있는데 펑션 키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Fn 키와 숫자 키를 조합해서 입력합니다. 펑션 키를 자주 사용해야 하는 사용 시나리오에는 불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펑션 키를 더 빨리 입력할 수 있는데 이유는 손이 숫자 키 윗 줄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숫자를 타이핑하다가 펑션 키를 입력해야 하면 펑션 키가 분리되어 있는 키보드는 손이 숫자 키보다 더 윗 줄까지 올라가야 하고 심지어 숫자 키와 펑션 키 사이에 공간이 넓은 키보드도 있어 오히려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불편합니다. 펑션 키를 입력할 때 숫자 키가 배치된 첫 번째 줄에서 조작을 마칠 수 있어 빠르게 타이핑하는 상황에 펑션 키를 섞어 입력할 때 더 빨리 입력할 수 있습니다.

또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홈, 엔드 키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 문서 작성에 불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미신 역시 다른 문자와 숫자를 타이핑 하는 상황에서 이 키들이 엔터 키 오른쪽에 분리된 키보드라면 홈이나 엔드 키를 누르려면 오른손이 상당히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문서를 작성할 때 이번 줄을 타이핑 하다가 줄 맨 앞으로 돌아가야 할 때 홈 키를 찾으려면 다른 키보드는 오른손이 엔터 키 너머 머나먼 곳까지 가야 하지만 이 키보드에서는 문자를 타이핑 하던 위치에서 거의 이동하지 않은 채로 바로 홈 키를 입력할 수 있습니다.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모두 오른손이 거의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입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이핑과 커서 내비게이션 키를 빠르게 섞어 입력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훨씬 빠르게 작업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마우스 커서 조작 인터페이스가 키보드 중간에 박혀 있는 씽크패드를 사용할 때 타이핑 도중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더라도 손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전환할 수 있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또 이 키보드는 주로 마우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시나리오에 더 유용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 키보드는 오히려 마우스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키보드입니다. 위에서 커서 내비게이션 키나 펑션 키를 입력하기 위해 손이 거의 이동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는데요. 특히 숫자 키패드와 커서 내비게이션 키가 별도 영역을 차지하지 않는데 그 결과 평소에 커서 내비게이션 키를 입력할 때 손이 이동할 위치에 마우스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오른손 기준으로 엔터 키보다 고작 몇 센티미터 옆으로 이동하면 바로 마우스를 잡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번갈아 가며 조작할 상황에도 씽크패드 키보드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빨리 입력 도구 사이를 전환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사용자 입장에서 캡스락 자리는 캡스락이 차지하기에는 너무 좋은 자리입니다. 이 키보드는 따로 설정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그 자리가 캡스락이 아니라 컨트롤 키입니다. 윈도우 기준으로 키보드 맨 아랫 줄에 컨트롤 키가 위치한 여느 키보드와 비교해 복사, 붙여 넣기 같은 반복 작업을 할 때 왼손 손목이 거의 꺾이지 않아 피로감이 훨씬 적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왼손으로 컨트롤 키와 다른 키를 조합해서 입력할 때 훨씬 편하고 컨트롤, 알트, 시프트 키를 동시에 입력할 때도 시프트 키와 컨트롤 키가 키보드 왼쪽 바깥에 붙어 있어 손날로 누르면 돼 이상한 손 모양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특징은 윈도우에서는 불편하다거나 엑셀을 사용하기 어렵다거나 커서 내비게이팅이 어렵다거나 하는 이 키보드 이야기만 나오면 반사적으로 딸려 나오는 미신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이 키 배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생산성을 가립니다. 만약 키보드에 돈을 좀 낼 생각이 있고 또 초반의 ‘낯선 경험'을 마주할 여유가 있다면 미래의 강력한 생산성 향상과 편리함을 얻을 수 있는 이 키보드를 추천합니다. 다만 종종 다른 사람이 내 키보드를 사용할 일이 있는 협업 환경에서는 내 자리에 찾아온 손님을 당황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손님용 키보드를 별도로 준비해 두는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