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sions Compared

Key

  • This line was added.
  • This line was removed.
  • Formatting was changed.

이건 암만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서 하는 투정입니다. 종종 트위터 타임라인에 포트폴리오를 봐 주시는 분들의 글이 지나갈 때마다 포트폴리오 컨설팅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내 멋대로 작성한 포트폴리오로 어떻게 밥벌이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신입 분들이 제출하신 문서를 보면서 지금처럼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간해선 포트폴리오 컨설팅을 해 주실 분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온라인에서 실명을 까고 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름은 뭐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다 까고 있다 보니 포트폴리오를 봐 주시는 분들의 눈에 들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실명 깐 지 오래 된 마당에 (본격적으로 실명을 깐 건 2018년) 익명으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것도 좀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이직 때도 내 마음대로 적당히 만든 멍청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고 메일을 보낼 때 느끼던 자괴감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발팀의 여러 직군 중 게임디자인은 여전히 정확히 뭘 제시해야 할 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엔지니어는 깃헙 주소나 기술블로그 주소를 제시하면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chatGPT로 기술블로그를 만들어낸 사례도 있고요. 아티스트는 온라인에 작품을 공개하거나 외주 업무를 하거나 인터뷰 자리에 바인더를 가져와 인쇄된 작업을 직접 보여주기도 하고 또 랩탑을 통해 작업물을 직접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게임디자인은 뭘 제시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구직 하시는 분들이 제출해주신 여러 자료를 살펴봐도 이 자료를 기반으로 이분과 함께 일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초기에는 법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전 회사에서 일한 문서와 몇몇 자료를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제출하시는 분들을 마주치곤 합니다. 이미 말해버렸지만 이런 자료는 이전 회사와 계약을 깰 가능성이 높고 이 문서를 검토한 사람들 역시 문제에 휘말릴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이 자료들이 회사의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지, 어떤 프로세스 가운데 있었는지, 또 문서에 관여한 사람들과 방식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그저 ‘이런 작업에 관여했다’ 이상의 정보를 주지는 않습니다. 종종 문서 단계에서 이 분은 좀 심하다 싶어 필터링 되는 극 소수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전 회사에서 작업하신 문서에 근거해서는 긍정 의견, 부정 의견 모두 낼 수 없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 정보기관이 기밀문서를 외부에 공유할 때 주요 부분을 가리는 것처럼 주요 문장, 숫자, 이미지를 가려 제출하시기도 하는데 이전 회사와 법적인 문제를 완화할 좋은 접근이기는 하지만 가려진 부분을 빼고 나면 무슨 문서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 상황은 종종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채 시간을 소모하게 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래 전에 다른 일을 하다가 맨 처음 게임회사에 지원할 때는 기획서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시에 모바일 게임 개발팀에 지원하려고 해서 피처폰 화면과 숫자키패드 기반으로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을 멋대로 생각해 시나리오와 규칙과 규칙을 나타내는 플로우차트와 이 게임을 4주 안에 개발하겠다는 원대한 타임라인을 묶어 제출했습니다. 지금은 이 파일을 유실 했지만 생각나는 부분들을 떠올려 보면 이런 걸로는 개발을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걸 제시하면 협업 부서들은 ‘그래. 뭘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그래서 기획서는 어딨는데?’ 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때 지원하던 팀에서 ‘그래도 이 사람은 뭘 가르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채용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다른 이직 때는 업무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서 내가 기여해서 달성한 목표를 제시하고 이 목표에 도달하는데 기여한 부서들과 이 부서들의 협업 과정, 이 안에서 내 기여를 표현하려고 해봤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미 이전에 작업한 문서를 제출하는 것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이전 경험 중 드러내고 싶은 에피소드를 골라 이 에피소드를 포함한 개발 결과를 제시하고 이 개발을 시작하게 된 동기, 팀 내 상황, 진행 과정, 개발에 기여한 부서들, 내가 참여한 부분, 내 결과물의 일부를 재구성한 자료를 문서로 만들었습니다.

말로 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내용을 문서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처음에는 이런 내용을 스크롤 하며 읽을 수 있는 문서로 만들어봤는데 가독성이 나빴습니다. 문서 형식으로는 빽빽한 글의 한계를 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반대로 내가 이런 문서를 받게 된다면 과연 이를 신경 써서 읽을 것인지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워포인트 형식으로 바꿨는데 이 역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문서 형식일 때는 좀 더 너절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프리젠테이션으로 형식이 바뀌니 문장이 한 줄을 넘어가면 꼴 보기 싫은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이전 작업의 스크린샷을 제시할 때 프리젠테이션 형식은 스크린샷과 설명을 문서 형태로 한번에 제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이직 때 역시 같은 방식을 사용했는데 운 좋게 구직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명쾌한 방법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이전 어느 회사에서 인턴십 이력서를 검토하다가 아름다운 포트폴리오 문서를 봤습니다. 게임 회사에 처음 지원하시는 분이 작성한 문서였는데 A4 크기로 인쇄할 수 있는 크기의 문서애 자기 소개와 관심사와 그동안의 이력과 할 수 있는 일과 경험이 보기 좋게 나열된 기억에 남는 문서였습니다. 이 문서를 작성하신 분은 괜히 미적거리다 놓칠 수 있겠다 싶어 재빨리 진행했고 이후 인턴십 종료에 맞춰 재빨리 전환 채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머릿속에 남은 좀 더 미화되었을 것이 분명한 기억만 남아있지만 앞으로 포트폴리오 문서를 작성한다면 그 정도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높은 목표가 생겼습니다.

이 문서에 감명을 받아 이후 내 이직 때 비슷하게 흉내 내려고 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한동안 이직 계획이 없지만 포트폴리오 컨설팅 이야기가 타임라인에 지나갈 때마다 진지하게 의견을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전히 실명을 까 버린 이상 컨설팅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 분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같은 고민을 계속하겠지만 언젠가 한번은 익명으로라도 컨성팅 받기를 시도할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