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 업무 부재

정확히 어디서 들은 말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억 속에 이 업계가 유난히 대관 업무를 잘 못 한다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대관 업무는 관, 즉 정부 기관을 대상으로 한 업무라는 의미입니다. 여느 업계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부 기관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전달하기도 하고 업계가 일관된 목소리를 내 의견을 형성해 입법 과정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또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일종의 로비를 통해 업계에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켜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 의견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 회사, 이들의 집합이 목소리를 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업계는 이런 업무를 잘 못할 뿐 아니라 이런 업무에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오래 전 저는 어느 작은 라이브 팀에서 매달 업데이트 되는 게임의 심의 요청 서류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사실 회사에는 실제 외부 심의 기관과 직접 서류를 주고 받는 부서와 담당자가 따로 있었고 제가 하는 일은 프로젝트 단위에서 다음 업데이트 사항을 형식에 맞춰 작성한 다음 담당 부서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업데이트를 실행하기 전까지 기관으로부터 등급 판정을 받아 게임이 실행될 때 구석에 큼직한 모양으로 ‘전체이용가’ 표시를 하더라도 이 표시가 우리가 멋대로 붙인 표시가 아니라 실제 기관으로부터 승인된 상태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기관에서 게임을 살펴볼 수 있도록 테스트 서버를 열어 놓고 기다리면 기관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게임을 살펴봤고 어렵지 않게 심의를 마무리 할 수 있었지만 이 뒤에는 분명 회사 차원에서 운영하는 대외 업무 담당 부서가 이 어렵지 않아 보이는 과정을 운영하고 있었을 겁니다. 덕분에 전체이용가 게임에 들어갈 텍스트를 작성하다가 야근에 지쳐 암만 해도 적을 처치하라는 목표에 적절한 텍스트를 떠올리지 못해 애라 모르겠다 하고 ‘적을 죽여라’라는 텍스트를 섰지만 무사히 심의를 통과할 수 있었고 이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무책임한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심의 업무 외에도 2024년 초봄 현재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당시 관은 청소년 보호를 위해 밤 시간대에는 청소년들이 게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셧다운제를 시행합니다. 청소년으로 확인된 고객이 지정된 시간대에 게임을 하고 있으면 이를 튕겨내고 이 시간 동안은 게임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은 이 자체만 봐서는 꽤 간단해 보이지만 이 뒤에는 온갖 방식으로 서비스 되고 있는 게임들의 특성 상 실제로 달성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무엇을 게임으로 정의할 것인지 부터 간단하지 않았는데 이미 이 문제는 등급을 심의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된 바 있습니다.

게임을 정의하는 기준은 모호했기에 개인이 만든 간단한 서비스조차도 심의 대상이 되어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큰 비용을 들여 심의를 받거나 그냥 서비스를 공개해 놓았을 뿐인데도 범법자가 되는 이상한 선택지만이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또 고객이 청소년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실명확인이 필요했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개발과 별도 실명확인 비용이 필요했고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서비스는 이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게임의 특성에 따라 고객을 그냥 튕겨내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는데 가령 최상위 컨텐츠로 PvP를 플레이 하고 있던 고객이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튕겨내면 이 고객은 게임에서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되는데 이는 고객의 손해일 뿐 아니라 회사의 손해이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형의 손해는 복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하는 게임은 플랫폼에 따라 각기 다른 실명확인 주체를 통해 고객이 청소년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했는데 이들 각각에 맞춰 서비스를 구축해야 함은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실명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개발사가 직접 부담해야 하기도 했으며 이 고객이 청소년인지 여부를 제작사가 저장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개인정보보호 관련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심찮게 보안 사고가 일어나 보유할 필요가 없었던 고객 정보가 유출되어 같은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사용하는 서비스들로 문제가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미디어에는 종종 아직 성인이 아닌 프로게이머가 업무로써 진행하던 게임이 종료되어 피해를 입는가 하면 유료 관객이 모인 무대에서 진행해야 할 게임을 실행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웃긴 일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업계 전체에서는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러는 사이에 업계 차원의 대관 업무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부는 필요할 때마다 종종 업계를 향해 날을 세우고 새로운 규제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하곤 했지만 막상 일선에서 일하는 우리들 입장에서 그런 규제는 그냥 실행되면 대응하고 아니면 마는 여느 요구사항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저 규제를 따르되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가급적 회사 차원에서 규제를 따라 각 프로젝트가 직접 소요하는 비용 역시 최소화하고 그 영향 역시 최소화하며 국내 서비스 난이도가 올라가면 국내 바깥에서 활로를 찾아 서비스 지역을 늘려 가는 방식으로 대응하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관 업무를 통해 업계의 상황을 알리고 같은 목소리를 내 게임 규칙 설정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민, 관이 같은 목소리를 업계를 비판하더라도 업계는 그저 묵묵히 비판 받을 일을 수행하며 외부의 의견을 들을 생각이 별로 없는 단일한 악의 존재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규제가 있으면 그저 견디고 다른 활로를 찾는 방식의 대응은 이런 대응이 가능한 곳들만이 시장에서 살아남게 만들었고 또 규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을 발견하면 전력을 다해 여기에 집중했습니다. 가령 과거 PC게임은 아주 오래 전 적용된 셧다운제나 결제금액 상한 제한 같은 규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디아블로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게임 웹사이트에 적용되는 신용카드 결제 상한보다 게임 가격이 높아 신용카드 대신 다른 지불 수단을 이용해 게임을 구입해야만 하는 이상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복잡한 심의를 준수하느니 플랫폼을 포기하고 자율 심의를 운용하는 모바일 플랫폼으로 전환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과거에 디아블로를 플레이 할 마음이 강하지 않았다면 신용카드 결제가 거절된 순간 포기했을 텐데 그 순간에 포기한 고객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율 심의와 결제금액 상한 제한이 없고 또 셧다운제의 제한도 없던 모바일 플랫폼에 업계 전체가 사활을 걸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게임의 규칙을 고치는데는 학습된 무력감이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관심도 없는 대신 규제가 완화된 시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덕분에 수 년에 걸쳐 모바일 시장에서 강한 경쟁이 일어났고 초기 PC게임 시장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모두가 비슷한 장르를 찍어내기를 반복했으며 그 안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발명한 소수가 의미 있는 경제적 성과를 거둡니다. 결제 금액 제한이 없는 특징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비즈니스 모델이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 때문에 고객들이 강한 피로감을 느껴 도리어 다른 플랫폼에 적용되는 규제를 모바일 게임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 이는 관에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최근 들려오는 새로운 규제에 대한 예고는 이런 고객들의 의견이 모인 여론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제 시야 안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규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과거의 규제를 견딘 덕분에 국내 시장 이외에도 다양한 국가로 활로를 개척한 덕분에 국내 시장 의존성이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때문에 국내 시장에 규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전에 비해 받을 충격이 훨씬 적어 규제 도입 과정에 직접 대응할 필요 역시 작습니다. 또 규제의 성격이나 형태에 관계 없이 어차피 규제에 대응하려면 비슷한 수준의 비용이 들 겁니다. 가령 셧다운제가 오후 10시에 시작되거나 11시에 시작되는 차이는 이로 인한 손해의 증감에 비해 이 규제에 대응하는데 드는 비용은 비슷하기 대문에 사실 규제가 어떤 모양이 돼도 이에 대응하는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대관 업무를 거의 수행하지 않아 경험이 거의 없어 업계의 의견을 의미 있는 방법으로 전달할 방법을 잘 모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한 업계 전체가 대관 업무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은 장기적인 업계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만들기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정도로 대관 업무에 무관심하면서도 멀쩡히 고용을 유지한 채 버티고 있는 업계의 어쩌면 약간 무기력한 대응과 이 대응의 성공이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상당한 규모가 아닌 이상 업계를 대표해 대관 업무를 담당할 조직이 등장하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합니다. 이미 대관 하지 않고 시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오랜 세월에 걸쳐 배웠고 게임의 규칙을 바꿔 이익을 취한 경험이 전혀 없어 이 필요성 역시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장기적으로 이런 자세는 업계 전체를 종종 위험에 빠뜨릴 테고 입법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대응 여지를 거의 없애겠지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관 업무 없이 어떻게든 다음 활로를 찾아낼 거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추신.

약간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플라스틱 업계가 환경 오염 압력을 처리한 방법은 대관 업무를 거의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업계에서 한번 생각해볼 만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플라스틱 업계는 자연 환경에서 거의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을 대량 생산해 유통 시켜 왔는데 게임 업계의 자율 심의와 비슷한 방법으로 플라스틱을 분리수거 해 재활용 시키는 운동을 스스로 실행합니다. 하지만 현대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스틱 거의 대부분은 분리수거 해도 재활용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플라스틱 제품마다 어느 한 구석에는 재활용을 의미하는 삼각형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복잡한 플라스틱 종류가 적혀 있는데 이는 마치 이 표시가 있는 모든 제품이 재활용 가능할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 기반 위에서 미디어는 플라스틱이 재활용 되지 않아 생기는 심각한 문제를 선정적으로 보여주며 생산자의 책임을 부각하는 대신 가정의 재활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줘 문제의 핵심을 감춥니다. 물론 업계의 대관 업무를 통해 이런 재활용 규칙이 무사히 입법 과정을 통과했겠지만 일종의 업계 자율 규정이 규제의 도입과 소비자들의 인식을 핵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접근으로 참고할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