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혈석은 한 반에 하나만 들 수 있을까

가상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것 중 하나는 문입니다. 실제 세계에서 잠긴 문은 원칙적으로는 열 수 없지만 실제 세계의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물리적으로는 어지간한 문이라도 열 수 있습니다. 이 규칙을 가상 세계에 적용해 보면 법률의 보호를 받기 쉽지는 않지만 로스 산토스에서 범죄를 저지른 다음 경찰을 피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고 또 실제 세계에서 처벌을 받지도 않기 때문에 물리 법칙만을 고려하면 잠긴 문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 잠긴 문은 마치 그 세계의 가장 강력한 규칙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냥 몸으로 부딪치면 열릴 것 같이 생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나무 문짝도 일단 잠겨 있기만 하면 절대로 열 수가 없습니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자동차로 들이받고 탱크를 가져와 주포를 쏴도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이런 특징을 활용해 최근 플레이 한 파크라이 6에서는 나름 수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요새에 들어가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병사 수 십 명과 헬리콥터 여러 대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고 이제 더 이상 병사가 남아 있지 않은 요새를 한가로이 돌아다니며 미션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는 이런 특징이 가끔 게임에 몰입을 깰 때도 있지만 게임의 배경이 중세나 판타지로 옮겨지면 문은 단순히 잠겨 있지 않고 뭔가 더 강력한 힘으로 봉인 되어 있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디아블로에서 웬만한 문은 주인공의 완력 만으로도 쉽게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 뿐만 아니라 게임 속 기술력에 기반해 지어진 어지간한 건물은 주인공 야먄용사가 선조의 망치로 내리치면 그냥 박살이 날 것 같고 지하감옥의 웬만한 철문 역시 그냥 톡 치면 부서집니다. 그래서 게임 상에서 정말로 잠겨 있어야 하는 문은 그냥 잠겨 있지 않고 주인공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잠겨 있어서 단순히 완력 만으로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한편 디아블로 4를 살펴보면 문 하나를 여는데 문 양쪽에 있는 두 가지 메커닉을 작동시키도록 만든 경우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전에 좌우 대칭 기믹에서 대략 설명한 대로 파티플레이 상황을 고려하거나 레벨디자인 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큽니다. 또한 같은 행동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두 번 반복하게 해서 플레이 시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습니다. 게임에 따라서는 마지막 보스를 가로막은 봉인에 일곱 가지 아이템을 가져와 끼워야 하는데 처음 부터 보스를 가로막은 문을 보여주고 관심을 가지게 만들고 이를 유지시키는 장치로 사용하기도 하고요.

디아블로 4에서는 크게 혈석 두 개를 사용해서 여는 문과 뱀의 눈 두 개를 사용해서 여는 문이 등장하는데 둘은 서로 똑같은 메커닉이지만 세부 동작은 조금 다릅니다. 뱀의 눈은 퀘스트 아이템 인벤토리에 한 번에 담아 이동한 다음 두 아이템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지만 혈석은 퀘스트 아이템이 아니어서 한 번에 하나만 들고 이동할 수 있어 한 번에 혈석 두 개를 인벤토리에 담아 가져와 문을 여는 방식으로는 플레이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한 쪽 혈석을 끼우고 다시 던전의 나머지 부분을 탐험해 두 번째 혈석을 따로 가져와야만 잠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들 둘은 거의 같은 메커닉인데 왜 이렇게 차이를 뒀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오직 개발팀만이 알고 있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혈석의 동작은 이 게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 게임이 얼마나 더 여느 MMO 게임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할 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도하긴 했지만 최종 게임에는 포함되지 않은 시스템의 흔적처럼 보입니다. 전통적인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퀘스트로 물건을 옮겨 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인상적인 퀘스트에는 최초의 3D 오픈월드 GTA인 GTA 3에서 자동차 트렁크에 시체를 싣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트렁크가 닫혀 있을 때는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지만 운전 하다가 차가 망가져 트렁크가 열리면 그때부터는 경찰이 내게 큰 관심을 주기 시작해 퀘스트가 어려워집니다. 하도 정신 나간 설정이어서 차가 흔들리는데 따라 트렁크가 여닫히며 시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그 뒤를 바짝 뒤쫓는 경찰들을 보며 하도 웃겨서 “뭐야 이거 미쳤어! 미쳤어!” 하며 플레이 했습니다.

또 물건을 직접 들고 옮기기도 하는데 종종 MMO 게임에서는 이런 플레이를 퍼시스턴트 월드에 가져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플레이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물건을 들면 전투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물건을 목적지에 들고 가서 내려놓은 다음에야 다시 일상적인 전투 가능한 상태가 되도록 합니다. 물건을 든 상태에서는 몬스터에 공격을 받으면 그냥 대미지를 받거나 물건을 떨어뜨린 다음 전투 가능한 상태가 되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을 활용해 물건을 옮기는 경로 상에 의도적으로 몬스터를 배치해 고객을 잠깐 고통받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디아블로 4는 물론 여러 가지 형식은 평범한 MMO 게임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이 게임은 근본적으로 액션 장르이고 또 핵 앤 슬래시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게임에서 물건을 들어 옮기다가 몬스터를 만날 때 몬스터에게 그저 맞고 있다면 이 게임에 고객들이 기대하는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들어 옮기는 여느 MMO 게임에 흔히 등장하는 메커닉을 넣어 테스트했지만 디아블로 프랜차이즈와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아 물건을 손에 드는 대신 등에 매도록 수정하고 물건을 등에 맨 상태에서도 전투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이 혈석은 이렇게 동작이 바뀌는 도중에 개발한 메커닉일 수 있습니다.

뱀의 눈은 퀘스트아이템으로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어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한 번에 얻어 문으로 돌아와 이들을 사용해 문을 한 번에 열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저 아이템일 뿐이어서 플레이어 외형에 변화를 주지도 않고 행동에 제약을 주지도 않습니다. 반면 혈석은 내부에서 테스트할 때는 어쩌면 손에 들고 옮기는 물건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템이 아니어서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고 플레이어의 상태를 바꿔 물건을 들고 이동하도록 했을 겁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 기능이 변경되면서 퀘스트 담당자는 고민을 해야 했을 겁니다.

뱀의 눈처럼 혈석도 그냥 퀘스트 아이템으로 만들어 인벤토리에 넣어 변경된 기능을 완전히 회피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물건을 등에 매되 시각적으로 한 번에 물건 하나만 등에 맬 수 있어 같은 행동을 두 번 반복하게 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했을 겁니다. 사실 뱀의 눈은 오픈월드에서 수집하니 한 번에 두 가지 목표를 수행하게 해도 플레이 시간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지만 혈석은 던전 안에서 수집해야 하니 이들을 한 번에 들고 올 수 있게 만들면 플레이 시간에 자칫 큰 영향을 줄 수 있어 던전을 많이 고쳐야 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데 이를 회피하기 위해 혈석을 등에 매는 방식을 사용하고 한 번에 혈석을 하나만 들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뱀의 눈은 퀘스트 아이템으로 인벤토리에 들어갈 수 있고 이 아이템을 오픈월드에서 획득하므로 한 번에 아이템을 하나만 들도록 강제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혈석은 게임의 요구사항을 정의하기 위한 실험 과정에서 손에 들고 이동하는 물건 메커닉을 실험한 흔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혈석을 등 뒤로 매 혈석을 운반하는 상태에서도 전투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 영향을 받아 혈석을 통해 열리는 문은 혈석 두 개를 한 번에 들고 이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