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소매트릭 뷰에서 거대보스의 문제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 결국 둘 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이소매트릭 뷰를 선택한 게임 프로젝트 두 개에 기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 둘은 한때 판교의 양대 희망으로 불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통 출시할 줄을 모르다가 어느 순간 판교의 양대 절망으로 불리기도 하고 또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팀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겪고 또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스탭들이 서로 상대 프로젝트로 옮겨 지옥에서 불지옥으로 옮겨 가는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 경우에는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바로 옮긴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양쪽 모두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웃기다고 생각한 점은 서로 비슷한 장르 게임을 만들면서 서로 놀랍게 비슷한 고민을 하고 또 비슷한 결론에 다다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서로 스탭을 교환하며 정보가 섞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양쪽의 문서를 살펴보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각자 비슷한 문제를 발견하고 비슷한 사고 과정을 통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 과정에 의한 결과일 겁니다.

디아블로 4 후반을 플레이 하다 보니 이전에 나타났던 보스들보다 훨씬 크고 또 전장의 너비도 훨씬 넓은 스테이지가 나타났는데 디아블로 4는 일상적인 플레이에서도 세계의 높이와 깊이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를 한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보스의 거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를 좀 더 멀리 두는 이 장르에서는 꽤 골치아픈 결정을 내린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일단 이전의 디아블로 시리즈는 세계가 평면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계단 같은 장치가 있기는 했지만 계단 만으로는 세계에 깊이감을 주기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주 긴 나선형 계단은 분명 좌표 상으로는 아주 높거나 깊은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 맞지만 모니터 바깥의 고객 입장에서는 이를 잘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디아블로 4에서는 세계 곳곳에 일상적으로 수직으로 이동하는 메커닉을 설치해 두고 먼 배경을 보여주며 고저차가 큰 공간 사이를 이동하게 만들어 세계의 높이와 그 깊이를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처음에 이야기한 판교에서 널리 알려진 두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 중 어느 한 쪽의 레벨디자인 가이드에 있는 기초적인 가이드라인이기도 해서 어느 한 쪽의 세계를 살펴보면 이 장치를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사용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쩌면 디아블로는 이런 사례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겁니다.

한편 이 장르 게임은 화면 상에 나타나는 내 캐릭터와 주변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시야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아이소매트릭 뷰는 모니터 밖의 고객이 게임 속 세계에 대한 시야가 제한되므로 제한된 시야 안에 게임을 플레이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모두 표현해야만 합니다. 시점이 좀 더 자유로운 게임이라면 세계에 직접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데 가령 이동할 방향의 공중에 이정표를 세우거나 소니 퍼스트퍼티 액션 프랜차이즈처럼 이번 스테이지에 이동해야 할 목적지를 저 멀리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소매트릭 뷰에서는 사실상 정보를 제공할 방법이 플레이어를 둘러싼 바닥 뿐이어서 바닥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극도로 유한한 자원인데 고객이 기대하는 전투 수준은 정보 전달이 훨씬 자유로운 장르와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바닥을 통해 전달하는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만의 독특한 정보 전달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

또한 이 장르에서 근거리 클래스는 상대적으로 문제가 덜하지만 원거리 공격이 핵심인 클래스는 플레이어와 카메라 사이 거리가 달라져 화면 상에 보이는 바닥의 범위가 달라지면 플레이 감각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니터 상에서 감각적으로 거리를 측정해 스킬을 사용해 왔는데 카메라 거리가 달라지면 이 감각이 흐트러져 이전에는 성공하던 스킬을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PvP 게임에서는 엄청나게 민감한 부분이어서 정말 엄청나게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절대 카메라 거리를 변경하지 않습니다. 반면 디아블로 4 보스 전투는 파티 혹은 싱글플레이 환경이어서 거리에 대한 감각이 PvP 게임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거대한 보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 거리에 손을 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거대 보스는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에서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인데 게임이 클라이맥스로 진행되어 가면서 언제까지 플레이어와 비슷한 인간형 몬스터만 상대하게 해서는 점점 더 고저되어 가는 분위기를 표현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난 슈터 메커닉과 성장 장르에서 인간형 몬스터만으로는 난이도를 올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예 인간형이 아닌 모습의 몬스터를 사용해 난이도를 올린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형 몬스터는 플레이어와 크기가 비슷해 한 화면에 보여주는데 부담이 없지만 일단 사람처럼 생겨서야 마법처럼 보이는 공격 말고는 납득할 수 있는 강한 공격에 의한 난이도를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닥을 무너뜨려 전장을 좁히기도 하고 비겁하게 보스가 졸개들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는 쉬운 선택은 거대 보스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소매트릭 뷰에서 플레이어와 크기 차이가 많이 나는 거대 보스는 일단 그 등장부터 문제가 생기는데 플레이어와 비교해 키가 크다면 이 보스는 한 화면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 아이소매트릭 뷰는 화면 아래쪽 면적이 더 좁고 화면 위쪽 면적이 더 넓은 뒤집힌 사다리꼴 모양의 시야를 제공하는데 이 상태에서 보스 위쪽에서 보스를 공격하려면 화면 상에서 보스 안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간 다음에야 보스를 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보스 아래쪽 바닥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앞에서 이 카메라 뷰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바닥에 표시되는데 이 정보를 잘 볼 수 없게 됩니다. 거대 보스는 상황 상 출연 시킬 수밖에 없어 보이지만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와 크기 차이가 많이 나는 보스를 등장 시킬 계획을 세우기만 해도 이미 고통이 시작됩니다.

이번 디아블로 4에서는 거대 보스를 등장시키되 카메라를 뒤로 빼서 이런 문제를 완화했는데 일단 싱글플레이 혹은 파티플레이 상황일 테니 원거리 클래스의 플레이 감각이 좀 깨질 수 있음은 감안한다 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원래 즐겨 플레이 하던 카메라 거리보다 멀어지면 플레이어의 이동 속도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화면 상의 같은 거리를 이동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캐릭터가 느려진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는 당연한데 보스가 커졌고 전장이 넓어졌으니 전장 한 쪽에서 반대쪽 끝까지 이동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거대 보스는 이런 넓은 전장을 감안해 이동하게 만들어져 단위 시간 안에 더 먼 거리를 이동하고 이동기에 제한이 있는 캐릭터들은 보스를 쫓아 이동할 때 평소보다 더 느리고 답답하다고 느낍니다.

또 전장이 넓어지고 이에 맞춰 바닥도 넓어져 좀 더 많은 정보를 한 번에 표현할 수 있지만 반대로 모니터를 기준으로는 정보 밀도가 높아져 한 번에 신경 쓸 대상이 갑자기 늘어나 어렵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플레이어 주변 바닥과 스킬 쿨타임 인터페이스, 체력과 자원 인터페이스가 보이는 지점에 집중한 채로 플레이 할 수 있었다면 카메라가 멀리 이동하는 순간 바닥과 인터페이스 사이에 공간이 멀어지며 갑자기 얼마 안 남은 체력을 놓치거나 분명 뻔한 장판 공격인데 갑자기 회피하지 못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들은 종종 같은 카메라 거리를 유지하되 보스 등장, 페이즈 전환 같은 이벤트에 잠깐 카메라를 빼서 컷씬을 보여주며 넓은 공간과 거대한 보스를 직접 보여주고 다시 게임으로 돌아갈 때는 이전과 같은 뷰를 사용해 실제 전투 감각을 유지하되 거대한 보스의 일부분만을 보여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중간 중간에 거대한 보스의 드넓은 전장을 자주 보여줄 수 있도록 전투를 잠깐 중단 시키고 상황을 보여주는 컷씬이 나올 이벤트를 다양하게 배치합니다.

결론. 디아블로 4의 거대 보스 스테이지는 아이소매트릭 뷰 게임에서 거대한 보스 전체를 보여주고 이에 어울리는 넓은 전장을 함께 보여주도록 플레이어와 카메라 사이 거리를 조절했습니다. 카메라 거리를 늘리면 보스 전신을 보여줄 수 있고 또 넓은 전장을 체감하게 할 수도 있지만 클래스에 따라 플레이 감각이 틀어지며 특히 PvP 장르에서는 아주 민감한 문제여서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단 이 게임에서는 싱글플레이 환경이어서 플레이 감각이 깨질 것을 감수하고 거대 보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 거리를 조절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