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이름을 생략하기

머나먼 옛날 한국에서 첫 번째 세대 MMO 게임이 전 세계적인 첫 세대 MMO 게임과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출시됐고 첫 세대와 그 다음 세대를 아슬아슬하게 가를 만한 모호한 시점에 등장한 또 다른 MMO 게임은 커다란 경제적 성과를 거뒀을 뿐 아니라 게임 속 가상 세계를 경험한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추억을 남겼습니다.

이 게임은 계정으로 만들고 캐릭터를 생성하면 아무 설명도 없이 전통적인 롤플레잉 스타일의 능력치 설정을 요구했는데 그 시대에는 이런 요구가 별로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정보 없이 게임을 시작한 사람들은 별로 효율적이지 않은 모양으로 능력치를 분배했고 이 실수를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비슷한 레벨과 클래스인 다른 사람들의 캐릭터에 비해 충분히 효율적이지 않은 자신의 캐릭터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곤 했습니다. 당시에 이 능력치 설정은 캐릭터를 처음 만들 때 단 한 번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깨달은 사람들은 아주 조금 덜 효율적인 자신의 캐릭터를 그냥 플레이 하거나 이런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북아시아의 어느 반도 사람들의 스테레오타입처럼 망캐를 아이템 보관함으로 격하 시키고 가장 효율적인 능력치로 설정한 새 캐릭터를 카우는 엄청난 수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게임은 2023년 여름 현재 현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게도 계정을 만들 때 한국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했는데 아직 주민등록번호의 진위 여부를 전산을 통해 확인하는 개인정보확인 시스템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숫자들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또 마지막 체크섬 숫자가 일치하면 아무 번호로나 계정을 생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또 다들 서비스에 가입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는데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 않던 기묘한 시대였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자기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 계정을 생성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주민등록번호에 기반해 게임 내 성별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 게임 내에 두 가지 성별로 인식되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실제 세계에서도 같은 성별로 인식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았고 이 규칙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주로 다른 성별 외형의 캐릭터를 플레이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나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제출한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게임 상에 드러나는 성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이 특성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개인정보보호 관련 법률이 강화되고 또 주민등록번호를 전산을 통해 검증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객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새로 출시되는 게임 상의 성별 외형을 선택할 수 있도록 대부분이 캐릭터를 생성할 때 성별 외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캐릭터 외형을 선택하기 전에 여성 또는 남성을 선택하는 메뉴나 버튼이 나오는 것에 별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교육을 통해 이 세상의 성별은 이렇게 두 가지 버튼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외형으로만 구분할 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게임은 아주 오랫동안 이런 방식을 유지해 왔고 딱히 그 누구도 이 상태가 문제라고 여기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외국의 유명한 서비스나 게임들은 변화를 겪으며 게임 상의 성별이 단지 전통적인 성별 구분에 따른 외형에 불과하다는 관점으로 묘사하고 또 가입할 때 여러 가지 성별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여러 게임에 걸쳐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여러 번 참여했는데 이 때마다 개인적으로 그리 편안하지는 않은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흔히 여러 게임에 걸쳐 여성형 캐릭터가 남성형 캐릭터보다 더 예쁘다는 평을 받는 게임이 많은데 개인적인 경험의 범위 안에서 설명하면 실제로 여성형 캐릭터에 더 많은, 정확히는 엄청나게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남성형 캐릭터에는 상대적으로 별 비용을 들이지 않으며 남성형 캐릭터에 다양한 외형을 개발하려는 시도 역시 소홀한 편입니다. 그래서 여러 게임이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들 뻔한 남성형 캐릭터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성형 캐릭터 역시 결코 다양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소위 예쁜 모양의 범위 안에서 표현하기 위해 꽤 깊이 연구했고 이 과정에 게임디자인 입장으로 참여하기만 해도 사람 얼굴을 해부학적인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이들을 게임 상에 표현되는 구성요소를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이들이 어떤 범위에 있어야 소위 ‘예쁜 상태'를 깨지 않는지 설명할 수 있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소위 ‘예쁜 여성형 캐릭터'에 대한 일종의 집착은 심지어 개성 있는 커스터마이징을 지향하다가도 여성형 캐릭터의 외형 설정에 와서는 그 임의로 정의한 예쁜 상태를 깨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남성형 캐릭터에서는 가능했던 충분히 넓은 범위의 본 좌표 조정 범위가 극도로 줄어들어 슬라이드바를 아무리 옮겨도 뭐가 바뀐 건지 알아보기 아주 어렵게 되기도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 까지 제한할 필요가 있을지 문제를 제기해 본 적이 있는데 뭔가 이런 주제로 말을 섞는 순간 도저히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은 아주 강력한 ‘예쁜 여성형 캐릭터’에 대한 정의 혹은 고정관념이 있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나 훨씬 높은 지위 같은 다른 수단이 필요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 타임라인을 읽다가 성별 대신 신체 유형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을 봤고 개인적으로 깊이 동의합니다. 교육에 의해 이 세상에는 단순히 두 가지 버튼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성별에 대한 정의가 있고 이 두 가지 버튼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전통적인 성별 구분에 의한 신체 유형을 정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캐릭터를 만들 때 이 선택은 마치 캐릭터의 실제 성별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 항상 불편한 느낌을 받아 왔습니다.

최근에 참여한 프로젝트에서는 캐릭터를 생성할 때 성별 선택을 없애고 전통적인 성별 구분에 의한 신체 형태를 성별 구분 없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캐릭터를 생성할 때 여러 신체 모양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 신체 모양들은 미래적인 설정에 따라 현대에 비해서는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전통적인 성별 구분에 따른 신체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령 남성형 신체 유형은 여성형 신체 유형에 비해 키가 더 크고 어깨가 더 벌어져 있으며 좀 더 근육이 도드라지는 반면 여성형 신체 유형은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어깨가 좁으며 가슴이나 엉덩이 같은 곡선을 더 강조한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이미 2023년 여름 현재의 실상조차 반영하지 못하는데 당장 출퇴근 하며 스쳐 지나가는 젊은 분들을 관찰하면 이미 성별에 따른 키나 신체적 특성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게임 상에서 전통적인 성별에 따른 신체 모양의 특징을 좀 더 강조해 구분하기 쉽게 만든 거라고 인식하는 수준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별 구분 없이 성별은 단지 신체적 특징의 차이일 뿐이라는 개념으로 커스터마이징을 개발하며 온갖 스탭들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엄청나게 많이 들었습니다. ‘게임에 성별 선택이 없어요?’, ‘성별 구분 없이 신체 모양을 한 목록에서 선택하게 하는 거 맞아요?’, ‘성별 선택 어디 있어요?’ 같은 질문들이었는데 이 질문들은 단지 이 기능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 의도가 아니라 굉장히 집요하게 이 구분을 넣어야만 하고 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도가 묻어나는 느낌 마저 들었습니다. 한번은 새로 오신 스탭에게 같은 질문을 들은 다음 우리의 결정과 현재 상태를 설명하자 ‘풉!’ 하며 어이 없다는 반응을 눈 앞에서 본 적도 있는데 이쯤 되니 게임 속 가상 세계에서 명시적인 성별 구분 요구는 마치 너무나 당연한 전 우주적인 규칙이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화형이라도 당해야 하는 건가 싶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여튼 몇 달에 걸쳐 꼬박꼬박 이런 질문에 답하고 이런 상태를 유지한 결과는 기껏해야 캐릭터를 생성할 때 전통적인 여성형 신체 모양과 남성형 신체 모양이 한 목록 안에 나열되는 것 뿐입니다. 여전히 전통적인 각 성별에 따른 신체 유형은 심지어 2023년 현대의 최신 상태조차 반영하지 못하는 전통적이고도 또 전통적인 형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에 다른 게임의 커스터마이징을 개발하던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는데 여러 게임의 커스터마이징을 개발하며 저는 나이를 더 먹었고 경력이 더 길어졌으며 이전에 비해 사람들을 좀 더 잘 설득할 수 있게 됐고 또 상대의 멍청한 질문에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묵시적으로 팀 내 지위가 오르며 사람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고서도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는 달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가 기껏해야 성별 선택 버튼을 없애고 애초에 성별 구분이라는 표현 자체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 그저 전통적인 성별 구분에 따른 신체 유형들이 한 목록 안에 나열되는 것 뿐이고 각각의 신체 유형은 여전히 너무나도 전통적인 모양을 유지하고 있기는 합니다. 고작 이것 뿐이지만 이 상태에 도달하는데 몇 달에 걸쳐 다양한 신경질적인 반응에 대응해야 했고 이 상태가 자연스러움을 설득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사례와 다른 프로젝트들의 사례들이 항상 튀어나올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난리를 겪고도 이 정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한번은 업계에 널리 알려진 큰 회사 사장님이 전사적으로 전통적인 성별에 따른 신체 유형이나 미형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서양 기준의 다양한 신체적 특성과 성별 특성을 반영하라는 주문을 한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이 여러 채널을 통해 분출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대체 이 주제는 어느 정도 위상을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한 번에 멀리 가기는 어렵고 또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기껏해야 성별 선택 버튼을 없애고 관련 구분에 대한 언급을 없앤 다음 신체 유형을 한 목록에 표시하는데 그쳤지만 다음 번에는 좀 더 나아갈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그 큰 회사 사장님의 접근에 동의하며 언젠가 그 사장님 밑에서 그 요구사항에 따라 다시 일할 기회를 잡을 수 있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