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오브디아블로

디아블로 4를 시작했습니다. 실은 전전작 디아블로 3나 전작 디아블로 이모탈이 워낙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는 하지만 또 인생의 일부를 구성하는데 기여한 게임 신작이 나왔으니 이걸 당장 풀 프라이스를 지불하고 플레이 해야 할 지 그냥 좀 기다려야 할 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아침에 눈을 떠 씻고 준비해서 출근하는 습관처럼 새 디아블로가 나왔고 그냥 구입해서 플레이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전 같은 애정이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8만원, 10만원, 13만원짜리 가격표 앞에서 레스토랑의 메뉴판에서 잘 모르는 메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중간의 10만원 짜리를 선택하는 대신 고금리, 고물가 시대에 맞게 8만원 짜리 제품을 선택합니다.

이미 아트 스타일이 올드스쿨 디아블로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으니 개인적인 기대는 이들이 전작인 디아블로 이모탈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게임 방식을 얼마나 잘 배웠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디아블로 이모탈은 첫 발표부터 여러 모로 부침이 있었지만 디아블로에 동양 스타일의 강한 성장과 경쟁 시스템을 조화롭게 구성한 좋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팬들은 디아블로 1, 2 스타일의 끝이 있고 선택적으로 그 다음을 진행할 수 있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디아블로를 원할 지도 모르지만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랜차이즈 신작을 개발할 결정을 내린 스폰서 입장에서 받아들일 만한 게임은 절대 아닙니다. 때문에 엄청난 개발비용을 지불한 스폰서의 기대와 전통적인 고객들의 평가, 그리고 전작을 개발하며 습득한 노하우가 조화된 게임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 중 하나이고 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를 만드는데 그 정도 기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차가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 새 디아블로를 시작하고 나서 맨 처음 든 뚜렷한 감정은 디아블로에는 디아블로 스타일의 아름답도록 간결한 시스템이 있고 이런 특징이 디아블로를 디아블로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아름다움을 깨는 요소들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다른 게임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서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리니지 이야기를 꺼내 보면 개인적으로 리니지에서 전투 시스템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게임 전체에서 전투가 담당하는 역할 측면에서 보면 아름다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리니지는 여느 그 세계에서 생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핵심에 가깝지 않은 온갖 잡다한 기능을 덕지덕지 바른 게임들과는 달리 전투에 의한 성장과 강력한 경쟁, 경쟁에 의한 부와 명예 획득이라는 아주 간결한 목표에 잘 부합하는 수준으로 게임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가령 여느 MMO 게임에서 퀘스트로 마을 밖에 나가 몬스터 사이에 피어난 약초를 채집하해야 한다고 칩시다. 여느 게임이라면 이 퀘스트는 아마도 전투에 의한 성장이 핵심인 게임의 본질을 약간 벗어나 채집과 제작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한, 혹은 그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한 퀘스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필드에 채집 대상이 널려 있고 가까이 다가가 채집 스킬을 사용하거나 별도의 채집 도구를 사용해 채집물을 인벤토리로 옮기고 또 채집 도구는 강화 대상이며 등급이 높은 채집 도구를 사용해야만 채집할 수 있는 채집물이 있는 등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이런 시스템은 마인크래프트처럼 전투와 성장이 핵심이 아닌 게임에서는 이상하지 않고 또 게임과 잘 어우러져 복잡하지 않으며 심지어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에 기반해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와 성장이 핵심인 게임에서 채집과 제작은 주의 깊게 설계하지 않는 이상 한 게임에 잘 녹아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순수한 리더십은 채집과 제작을 통해 생산한 물건이 게임 내에서 유통되어 전투와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선순환 경제를 만들어내게 될 거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시스템은 실제 세상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결코 생각한 대로 동작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아이디어가 생각대로 동작하지 않는지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주제와 너무 많이 벗어나니 언젠가 기회가 닿을 지도 모르는 시점으로 미루기로 하고 약초 채집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똑같은 약초 채집 퀘스트를 리니지에서 해 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데 리니지에는 딱히 채집 시스템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초는 특정 지역에 나타나는 오크가 들고 있고 그 오크를 공격하면 약초가 드랍됩니다. 고객은 플레이어를 조작해 이전과 똑같은 전투 경험을 통해 오크를 공격하고 오크로부터 드랍된 약초를 들고 돌아가 퀘스트를 수행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전투에 의한 성장과 강한 경쟁이라는 게임의 핵심을 벗어나는 아무런 요소도 없습니다. 내가 오크를 공격하는 목적이 스토리에 따라 누군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채집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냥 이 동네에서 레벨업을 하려는 것이든 그 결과 행동이 달라지지 않으며 이 행동에 필요한 게임 시스템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런 특징이 개인적으로 리니지 스타일의 핵심에 집중한 단순한 시스템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디아블로의 핵심은 괴물을 사냥해서 더 강한 아이템을 얻고 이를 활용해 더 강력한 괴물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흐르며 여기에 파티 플레이나 디아블로 이모탈과 디아블로 4 스타일의 오픈월드 상에서 다른 고객들과 우연찮게 서로 마주치며 협동하거나 경쟁하는 플레이 스타일이 더해지기는 하지만 게임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디아블로 역시 전투에 집중하고 게임 내 여러 행동이 서로 다른 스토리에 기반하더라도 결국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하는 행동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전투 시스템을 벗어나지 않으며 이런 점이 디아블로의 전투 시스템을 아름다울 정도로 단순하게 유지한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디아블로에서 바닥에 떨어진 식물을 채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단순히 지나가며 멀쩡한 집기를 때려 부숴 그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금화를 챙겨 가는 경험과는 상당히 다른 디아블로의 핵심에 가깝지도 않고 디아블로의 핵심 시스템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유지하지도 못할 것 같은 뭔가 디아블로와 어울리지 않는 시스템을 욱여 넣어 고객에게 쓸모 없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이 채집은 전혀 복잡하지 않으며 그저 지나가다가 바닥에 있는 채집 대상에 상호작용 해 아이템이 떨어지면 그걸 다시 줍기만 하면 됩니다. 복잡하게 채집 도구가 필요하거나 채집 레벨이 필요하거나 채집 도구에 별도 성장 시스템이 붙어 있는 식의 과도한 뭔가가 딸려 오지는 않습니다. 무기 걸이에 상호작용 해 분해할 무기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디아블로 프랜차이즈 게임에 과연 이런 채집과 제작 시스템이 이 정도 수준으로 들어가는 수준에서 끝난 것이 과연 처음부터 이 정도 수준으로만 채집 요소를 넣기를 원해서였을지 아니면 개발팀 내에서 이 요구사항을 디아블로 프랜차이즈에 어울리는 수준으로 조절하기 위해 격렬한 의사결정 과정이 일어났을지 한번 쯤 의심해 볼만 합니다. 결국 디아블로에 생긴 채집 기능은 나머지 핵심 시스템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칠 수준으로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이런 요소를 마주치는 순간 디아블로 프랜차이즈 전체가 전투를 통한 성장에 초점을 맞춘 아름다울 정도로 단순한 시스템을 유지해 온 노력이 아주 조금 희미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만렙에 도달하지도 못했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거슬리는 점들을 나열해보자면 일단 종종 몬스터 등장 애니메이션이 끝나기 전에 몬스터가 이미 플레이어와 같은 그라운드 레벨에 도착해 이를 공격하면 1타가 종종 씹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이해는 하지만 분명 테스트 하면서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그대로 내보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 이전에 쿨한 길찾기 궤적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곳에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그냥 쿨하게 넘어간 듯 보이는 요구사항과 그 의사결정을 부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플레이어의 진행 방향에 관계 없이 플레이어를 씹고 플레이어 쪽으로 열리는 문 방향 같은 건 좀 더 신경 쓸 법도 한데 그냥 출시해버렸다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그냥 쿨하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넘겼다고 해도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데 아쉬웠습니다.

또 이전 디아블로들과는 달리 뚜렷한 내러티브에 기반한 단기 목표가 잘 안 느껴졌습니다. 가령 1편은 던전 층 수 자체가 단기 목표였고 2편은 액트 및 액트 별 보스가 단기 목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3편은 잘 기억이 안 나고 이번 4편과 비슷한 전작 디아블로 이모탈에서도 어느 정도 스토리 진행에 따른 단기 목표를 인식하며 게임을 플레이 해 왔는데 이번에는 넓게 펼쳐진 세계 속에서 퀘스트를 반복하다 보니 지금 내가 뭘 위해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단기적으로 뭘 하고 있는지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통적인 MMO 스타일에 기반해 만렙까지는 선형 및 계단식 성장을 병행한 다음 만렙부터는 비효율 성장 구간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한 3편이나 이모탈, 그리고 월드오브워크래프트처럼 게임이 오래 가길 원하니까 이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디아블로 프랜차이즈에서 단기 목표를 내러티브 기반이 아니라 성장 수준으로 잡는 건 좀 이 게임 시리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아 아쉬웠습니다.

결론. 인생의 한 부분을 장식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 디아블로의 새 시리즈가 나왔고 습관적으로 구입해 플레이 하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핵심에 덜 집중한 결과로 짐작되는 간결한 아름다움에 흠이 있고 좀 더 다듬을 만한 사소한 단점들, 그리고 전작들과는 완연히 다른 단기 목표 부여는 여러 모로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게임은 디아블로 4라기보다는 월드오브디아블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