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폴리오 기획서는 의미 없지 않아요

이전에 포트폴리오 준비하기 어려움에서 투덜거렸지만 포트폴리오 작성은 여전히 골칫거리입니다. 여러 번 준비해봐도 도무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타임라인을 지나가다가 다른 분의 포트폴리오 기획서에 대한 고민이에 대한 조언을 봤고 포트폴리오 기획서에 대한 제 의견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게임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기에 현실적으로 난감합니다. 테크나 아트는 스스로 작업을 완결 시킬 수 있습니다. 작성한 코드, 동작하는 결과물, 에셋 등 완결된 작업을 포트폴리오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반면 게임디자인은 스스로 작업을 완결 시킬 수 있는 입장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테크 지원이 필요 없는 보드게임을 디자인한다 하더라도요. 그러니 항상 테크나 아트 직군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갖추고 스스로 어느 정도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말을 흔히 접하지만 실은 이 말은 무척 가혹한데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는 수준으로는 완결된 작업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테크나 아트가 하는 것처럼 완결된 작업을 제시하려면 결국 테크나 아트에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게임디자인 입장에서 이는 열심히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육기관에서는 팀 프로젝트를 통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직군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역할을 나눠 가지면 완결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직군의 지식과 스킬을 ‘수준 이상’ 갖춰야만 할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 댓가는 제대로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조차 달성하기 어려워하는 팀을 이뤄 작업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별 과제는 학교 시절에도 어렵지만 학교를 벗어나서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른 직군의 지식과 스킬을 수준 이상으로 갖추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교육기관에서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학생들 개개인에게 팀 빌딩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이상할 뿐 아니라 어려운 요구인데 상업 프로젝트 개발팀을 빌딩할 때 팀에 참여할 사람들 각각이 알아서 연락하고 알아서 서로에게 피칭하고 알아서 역량을 평가해 각자가 알아서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교육기관의 학생분들께는 쉽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젝트 팀 빌딩을 통해 경험하게 될 온갖 개같은 경험은 결국 본격적으로 돈을 받으며 일할 때도 똑같이 겪을 일을 미리 겪어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입니다. 인턴십이나 신입 인터뷰에 오신 분들께 프로젝트 경험을 여쭤보면 돈 받으며 일하는 우리들이 1년 내내 겪을 개같음을 훨씬 짧은 기간 동안에 더 강하게 체험하시곤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회사에서 일하는 이유는 돈을 받기 위함이고 회사에서 함부로 뻘짓을 하면 잘려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니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공포에 의해 통제됩니다. 하지만 학생분들로 이루어진 팀은 이런 통제 수단이 없는 데다가 명백한 문제 상황에 선생님들께 도움을 구해도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수행하는 팀 프로젝트는 직군 사이에 모호한 경계를 넘은 지식과 스킬을 나 혼자서 익혀 완결된 결과를 만들어내는 부담을 줄여 주지만 아주 진한 댓가를 요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게임디자인 직군을 지망하는 분들이 포트폴리오에 사용할 문서를 작성할 고민을 하는 것은 딱히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팀 프로젝트를 통해 포트폴리오로 제시할 만한 경험과 이에 기반한 문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대로 여기에는 큰 위험이 따릅니다.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은 어처구니없는 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면접자분을 위로한 적도 있습니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한편 이런 대단한 어려움을 겪으며 완성한 프로젝트는 그저 그런 수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디어는 우리들이 이를 실현해낼 수 있는 수준에 의해 제한됩니다. 머릿속에 있는 대단한 아이디어도 문서와 데이터구조에 의해 현실 세계에 나타나고 이를 기반으로 코드와 에셋을 지독하게 비벼 완성한 바이너리 덩어리가 처음 목표로 삼은 대단한 아이디어에 도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때문에 팀 프로젝트의 그저 그런 결과물로 이에 기여한 모든 사람들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이 분들께 너무 불리하고 또 가혹합니다.

이런 팀 프로젝트의 높은 위험을 감안해 다음 계획을 준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실현하기 위해 다른 직군 담당자들에게 전달할 작업 목록, 각 작업을 설명할 문서, 또 각자의 작업 결과를 돌려 받아 조립할 방법, 이 과정에서 생길 문제점과 개선 방안 등을 머릿속으로 생각해보며 이런 고민을 현실에 옮긴 문서는 의미 있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조언들처럼 의미 없지는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각 직군이 다른 직군의 도움 없이 혼자 완결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어필하는 대신 잘 모르는 작업에 매몰된 결과를 종종 봤습니다. 한번은 양산형 게임 개발팀에서 주니어 디자이너를 충원하려고 했습니다. 한 지원자분이 혼자서 준비한 멀티플레이 가능한 레이싱 게임을 시연하셨는데 분명 대단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콘솔에 서버가 돌고 그 위에 띄운 클라이언트 두 개가 서로 동기화 되어 상대 차량의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주니어 디자이너에게 기대한 것은 스스로 게임 서버를 만들거나 서로 동기화되는 클라이언트에 자동차 에셋을 올려 놓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슷한 장르 게임을 플레이 해 본 경험, 이 경험에 의한 문제 의식과 실현 가능 여부에 관계 없는 개선 방안, 이를 상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요령, 이런 주제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일정 수준으로 문서화하고 이에 필요한 글을 쓰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이 분의 훌륭함은 인정하지만 함께 일하자고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팀 프로젝트에 의한 각 직군 별 결과는 분명 대단한 성취입니다. 또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겪게 될 온갖 거지같은 사건은 앞으로 이 일을 하는 동안 겪게 될 어려움을 미리 회사의 통제 수단 없이 겪어 볼 기회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팀 프로젝트는 각자의 기여를 희석해 각자의 강점을 어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에 대비해서, 혹은 이와 별도로 게임디자인 직군을 지망하시는 분이 ‘포트폴리오용 기획서’를 작성하는 일은 당연하고 또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팀 프로젝트 결과 시연과 포트폴리오용 기획서 중 게임디자이너 개인의 역량과 가능성을 예상하기 더 유리한 자료는 포트폴리오 기획서입니다. 게임 전체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역량은 함께 일하며 갖추면 됩니다.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디자이너 개인의 역량과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여기에는 포트폴리오 기획서가 오히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팀 프로젝트는 그 어려움으로 인해 완결된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대단한 성취이지만 모두에게 이를 요구하는 것은 가혹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다른 분들의 의견과는 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의견 자체가 틀린 의견일 수도 있음을 감안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