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진적 닭갈비 디자인

지난 액티비티펍 네트워크의 부하 내구성 문제에서 짧은 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약간 장애 대응 비슷한 뭔가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편 이번에는 지난 휴가와 아무 상관 없이 갑작스레 당일로 태백에 다녀왔습니다. 전 날 점심때 까지만 해도 다음 날 어디 멀리 갈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갑작스레 은하수 여권에 도장을 찍으러 냅다 다녀 오기로 했습니다. 지난 휴가도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었지만 등대 스탬프 투어 때문이었고 도장이라면 제정신을 못 차리는 이상 갑자기 전날 결정된 일정이라도 냅다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백 은하수 여권은 태백시에서 정한 은하수 보기 좋은 위치마다 스탬프를 가져다 놓고 이들 모두를 돌며 도장을 찍으면 냉장고 자석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인데 도장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할 뿐 아니라 어디든 가면 항상 냉장고 자석을 사 오는 사람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편 은하수를 보기 좋은 위치들은 과연 태백 답게 여느 도시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어 분명 밤이 되면 캄캄하게 변해 별을 보기 좋을 것 같았는데 그런 한밤중에 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어 도장은 낮에 돌아다니며 찍고 일단 도장을 다 찍은 다음 별은 밤중에 그 중 한 곳에서 보기로 합니다. 수도권에서 느즈막히 출발해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간에 도착해 스탬프가 놓인 장소를 아주 효율적으로 돌면서도 주변에서 사진 찍고 놀기에 시간이 충분했지만 어느 순간 너무 목표 지향적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몸이 보내는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있다가 더 이상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저녁은 근처에서 잘 알려진 물닭갈비를 먹기로 합니다. 마침 근처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 통에 시내에 주차할 장소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간신히 어딘가에 차를 대고 혹시 위치를 까먹을 까봐 메신저에 위치 전송 기능으로 위치를 기록한 다음 물닭갈비 가게에 줄을 섰습니다. 닭갈비라면 집에서 자전거 타고 북한강 자전거길을 따라 춘천에 갔다 올 때 춘천에서 항상 점심으로 먹던 메뉴였는데 이 때는 주로 숯불에 구워 주는 가게에 가곤 했습니다. 한편 물닭갈비라는 음식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 이전에 먹어본 닭갈비를 떠올리며 도대체 ‘물닭갈비’란 무엇일지 기다리면서 그 생김새를 상상해 봤습니다. 처음 떠올린 건 익숙한 숯불에 구운 닭갈비가 끓는 물 속에 들어있는 모습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별로 맛 있을 것 같지 않은 모양이었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차례가 와 자리에 앉아 남들과 똑같이 물닭갈비와 사리를 주문합니다.

물닭갈비는 이전에 먹던 ‘닭갈비’와 달리 육수에 닭고기를 포함한 여러 재료를 한 번에 넣고 바로 끓여 먹는 음식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즉석떡볶기나 칼국수처럼 눈 앞에서 끓여 먹는 음식의 일종이었습니다. 이름에 ‘닭갈비’가 들어 있어서 오만 생각을 다 했지만 그렇게 이질감이 드는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식은 종종 적어도 고기는 미리 익혀 놓아 잠깐 기다려 국물이 끓기 시작하면 바로 먹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익히지 않은 닭고기가 들어 있었고 점원님은 ‘센 불로 익히세요’ 라고 말한 다음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물닭갈비라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은 요리 초보자들에게 맡겨져 위태로운 운명을 맞이합니다.

센 불이라지만 배고파 죽기 직전인 사람들을 앞에 둔 육수는 끓는데 억겁의 세월이 걸립니다. 게다가 국물이 끓기 시작하고 국자로 주섬주섬 높이 쌓인 재료들을 끓는 국물로 밀어 넣으며 입맛을 다셔 봤자 아직 요리의 비주얼은 아직 먹을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닭고기가 문제였는데 아예 익히지 않은 상태로 나왔기 때문에 국물이 끓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못 이기고 그냥 집어 먹었다가 운이 나쁘면 밤중에 어두운 하늘에 은하수 대신 화장실 천장에 형광등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거의 날이 밝아올 때 까지 기다린 끝에 고기가 익은 것처럼 보였고 주섬주섬 먹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 먹기 시작한 물닭갈비는 여전히 썩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국물이 끓고 있었지만 아직 희멀건한 느낌이었고 뭐 그냥 육수에 고추장 양념과 여러 재료를 때려 넣고 끓인 요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단 당장 먹을 수 있는 라면 사리가 불어 터지기 전에 걷어내 먹으며 이렇게 줄 서서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줄 서서 먹는 이유가 음식이 맛있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음식은 좀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펄펄 끓는 냄비로부터 라면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라면을 다 먹고 빈 앞접시에 냄비로부터 두 번째 국자를 퍼서 붓고 보니 처음 라면을 건져낼 때에 비해 앞접시가 훨씬 뜨거웠는데 한참 끓어 이제 냄비 위 국물 곳곳이 모두 비슷하게 가열되어 양념이 잘 퍼지기 시작한 것 같은 냄새를 풍깁니다. 이쯤 되면 제 아무리 고기라도 충분히 익었을 거라고 믿고 닭고기를 뜯기 시작했고 처음 라면을 건져 올릴 때에 비해 좀 더 나은 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아까의 희멀건 느낌 보다는 양념과 재료가 적당히 끓어 대강 동네 아무 즉석떢볶기집에 가서 끓여 먹는 비슷한 느낌이 났고 냄비에서 건져 올린 것이 떡이 아니라 닭고기라서 훨씬 괜찮았습니다.

여전히 펄펄 끓는 냄비로부터 그 다음 접시, 또 그 다음 접시에 음식을 떴을 때 이제 한참 배는 불러오고 또 냄비 위에 ‘음식이었던 것’은 슬슬 물기를 대부분 기화 시킨 나머지 처음의 희멀건한 느낌을 완전히 벗어나 한국식 볶음밥을 부르는 끈적하고 짭짤한 겔 상태가 되었고 어지간히 짜고 매운 맛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 입맛에 어울리게 변했습니다. 이쯤 되니 함께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육수를 끓이고 남은 끈적하고 짭짤한 국물을 국자로 긁어 앞접시로 옮기며 식사를 시작할 때의 아리송한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냄비 위에 남은 음식이 수분을 거의 날리고 더 이상 국자로 퍼 올릴 대상이 사라질 무렵 볶음밥을 시켜 이 끈적한 국물이라고 하기 뭣한 뭔가에 밥과 김과 양념을 뒤섞어 위장에 남은 공간을 마저 채우며 이 가게에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음식을 먹으며 개인적으로 이 가게에서 파는 물닭갈비라는 음식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밥상 한 가운데 부루스타를 올려 놓고 그 자리에서 팔팔 끓여 먹는 음식일 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음식은 가게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점진적인 식사 경험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닭갈비가 처음부터 익혀 나와서 ‘고기는 익혀 나왔으니까 바로 드시면 돼요’ 라는 안내를 받았다면 재료가 충분히 끓기 전부터 고기를 먹기 시작했을 테고 처음에 받았던 ‘희멀건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또한 이미 주인공인 고기를 다 먹어 버린 다음에는 먹기 시작할 때 내린 그저 그런 평가를 만회할 기회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맨 처음에 펄펄 끓는 냄비 위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라면 사리 뿐이었고 이를 건져 먹으며 그저 그런 멀건 국물에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하는 사이에도 냄비는 계속해서 끓어 나머지 재료들이 충분히 섞이고 또 충분히 끓을 시간을 확보합니다. 게다가 닭고기가 익지 않았다는 정보는 멀쩡히 눈 앞에 있는 음식을 좀 더 끓도록 내버려 두게 만들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당장의 허기를 달래고 또 저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아직 충분히 끓지 않은 멀건 국물을 퍼 먹으며 이미 이건 좀 별로 아닌가 하는 첫 인상을 받게 만듭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하게도 국물이 졸아 점점 더 짜 지는데 만약 이 짠 상태를 처음부터 먹었다면 맛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국물이 처음 끓을 때부터 아직 덜 끓은 국물 단계일 때 그 사이를 못 참고 먹기 시작한 덕분에 일정 시간마다 앞접시에 국물을 퍼 담을 때마다 한 단계 씩 맛이 강해져 나중에는 진득한 국물 비슷한 뭔가를 떠 먹으면서도 너무 맵거나 나무 짜다고 느끼는 대신 좋은 인상을 받습니다.

만약 주방에서 완전히 조리 되어 나오는 음식이거나 고기만 익혀 나오는 반조리 상태의 음식이었다면 이런 단계 별 경험을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조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로 먹기 시작하되 당장 이 시점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라면 뿐이어서 요리의 나머지 부분 대신 라면부터 먹어야 하고 덜 조리된 국물을 경험하며 앞으로 이어질 꽤 짠 음식에 준비하게 만들고 조리가 계속됨에 따라 국물이 점점 더 짜지지만 점진적으로 짜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먹었다면 너무 짜다고 생각할 법한 음식을 짠 느낌 대신 맛있다는 느낌으로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이 음식이 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밥상 가운데 부루스타를 올려놓고 그 자리에서 끓여 먹는 수많은 한국식 국물 요리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음식들은 한결 같이 눈앞에서 끓이기 시작해 끓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먹고 국물이 다 졸아버리면 육수를 추가하기도 하고 마지막엔 볶음밥을 올려 식사를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사 형태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누군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점진적으로 점점 더 잘 완성된 상태의 음식을 차츰 먹게 만들고 나중에는 완전히 익숙해져 꽤 짠 상태인데도 이를 맛있다고 느끼게 만들며 짠 것을 한참 먹었으니 이어서 볶음밥을 먹을 식욕이 남아 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태백에 다시 방문한다면 이 가게에서 다시 식사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펄펄 끓는 냄비에서 국물을 뜨다가 문득 든 ‘점진적 닭갈비 디자인’은 어떤 경험을 설계할 때 처음부터 핵심 경험을 한 번에 제공하는 대신 피경험자가 서서히 준비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을 때 한번 쯤 떠올리게 될 겁니다.

한편 딱히 별을 보는 취미가 있거나 별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제대로 된 관측 장비나 제대로 된 촬영 장비는 없었지만 유튜브에서 보고 배운 대로 아이폰을 셀카봉에 끼워 하늘을 향한 다음 스타워크 앱으로 구도를 잡은 다음 그 상태 그대로 카메라 앱으로 전환해 찍었더니 생각보다 너무 쉽게 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달이 떠오르는 바람에 자리를 한 번 옮겼는데 맨 눈으로 뭘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었지만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그냥 뻔히 하늘에 은하수가 지나고 있어 당황스러웠고 또 놀라웠습니다. 그냥 아이폰 밖에 없었지만 제가 본 별을 꽤 비슷한 모양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점도 신기했습니다.

아! 이번 주에도 다른 다섯 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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