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쓴 책을 살 필요는 아직 없어요

결론. 기계가 쓴 책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책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만 책 링크를 걸지는 않겠습니다. 기계가 만들어낸 텍스트를 사람이 책 모양으로 구성해 발매했다는 점이 상징적일 수는 있지만 이 책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습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기계적인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한 대상이나 현상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감정을 정의하자면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으니 이미 감정을 정의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대상의 상태와 감정은 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쉽게 오랫동안 탄 자동차나 가방, 집, 의자, 지갑, 사진 같은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들이 어떤 상태와 상태에 따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특히 이 대상에 여러 가지 상태가 있고 상태 각각이 무작위적으로 나타난다면 더더욱 쉽게 이 대상이 어떤 인격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가령 오랫동안 탄 자동차가 끝까지 멀쩡하게 움직였지만 새 차가 탁송되어 온 순간 더 이상 시동이 걸리지 않게 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분명 흥미롭고 또 의미가 없지 않지만 이 현상의 핵심은 사람이 자동차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격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직접 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게 의미를 부여하는 마당에 직접 말하는 대상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연어로 된 사람의 질문에 그럴듯하게 대답하는 기계는 너무도 쉽게 이 기계에 인격이 있고 또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말하는 기계는 기술적으로 그저 단어 하나로 출발해 이 뒤에 연결될 가장 그럴듯한 단어를 연결하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What Is ChatGPT Doing … and Why Does It Work?를 살펴보면 이 그럴듯하게 말하는 기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지능이나 지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생각해 오던 언어의 복잡성이나 이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지능은 마치 바둑이 그렇지 않았음을 입장했듯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에 기반하는 인간의 의식 역시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에 의해 재현할 수 있는 전기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는 여기까지 진행되지 않았고 말하는 기계는 여전히 어떤 감정이나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나타난 말하는 기계가 쓴 텍스트를 책 모양으로 재구성한 책은 마케팅 측면에서 분명 의미 있는 업적이지만 이 책을 우리들이 힘들게 번 돈을 내고 구입하거나 이 책의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며 읽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 책의 텍스트는 이 책에 독점적으로 실리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기계가 텍스트를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는 ‘프롬프트’라고 부르는 질문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 질문을 이 책의 목차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목차의 각 제목을 이를 묻는 의문문으로 바꿔 말하는 기계에 입력하면 책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의미 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은 텍스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말하는 기계에 직접 물어봐도 되는 질문을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책을 구입해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 책은 말하는 기계가 온전히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텍스트는 목차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는 프롬프트를 통해 얻은 텍스트를 기계번역을 통해 한국어로 옮긴 다음 이를 인간이 다듬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원문을 생성하는데 인간이 최소한만 관여했다는데 의미가 있겠지만 번역문을 인간이 다듬음으로써 말하는 기계가 생성해낸 텍스트의 의미만 남고 형식은 희미해졌을 겁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유려한 한국어 문체를 말하는 기계가 직접 말했다고 인식하겠지만 실상은 말하는 기계가 생성한 책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히 유려하지 않은 텍스트를 인간이 다듬은 글을 읽게 될 뿐이며 이로부터 말하는 기계를 대하는 감정이 상당히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런 왜곡을 감수하며 프롬프트를 통해 재현 가능한 글을 굳이 이 책을 통해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결론. 사람은 말하는 대상에게 쉽게 감정을 부여하고 인격이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상대는 단어를 그럴듯하게 나열하는 말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언어의 복잡성이나 우리가 의식이라고 하는 아직 복잡성이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가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에 의해 재현 가능한 보다 단순한 무언가로 귀결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으며 말하는 기계는 그저 기적적인 우연의 연속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일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때문에 말하는 기계의 결과에 아직까지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말하는 기계가 작성한 텍스트를 인간이 다듬은 책을 구입하는데 귀중한 돈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