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바꾸기

한번은 회식 자리에서 자신들의 빛나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빛이 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뭐 그렇게 까지 나쁘지는 않았다고 회상할 수 있는 그런 과거에 대해서였습니다. 누군가는 몇 십 년 전 서울의 어느 시장에서 가게마다 점심 도시락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의류 상가에서 의류를 강매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학교 주변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시비를 걸면 몰려나와 그 시대 기준으로는 용인 가능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각자의 일상적인 경험이나 범죄에 가까운 경험들이 조금씩은 과정 되어 지금 기준으로는 용납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아주 오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조명하며 사실 그 일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형법 상 공소시효가 지나 사실을 확인할 수도, 처벌을 할 수도 없기 대문에 가볍게 이야기하고 또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종종 누군가가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 때가 더 좋았다든가, 그 때의 경험이나 그 때의 환경이 지금 보다는 나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납득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시간축으로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고 이 이동 속도를 늦출 방법은 오직 공간축을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것 뿐입니다. 어그로 끌려고 좀 이상하게 말했는데 그냥 우리는 계속해서 미래로 가고 있고 이걸 멈출 방법은 없으며 과거는 오직 각자의 머릿속과 지금 남기는 기록에만 남에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미래를 맞이하고 있어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기에도 이야기할 주제가 넘쳐 나는 마당에 굳이 과거 이야기를 하며 미래 이야기를 할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직업으로 게임을 만들 때도 드러나곤 하는데 과거 게임 경험과 현재 게임 경험의 차이과거 경험 미화를 경계하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현대의 게임디자인은 현대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결과일 뿐 그 자체로 과거의 게임 경험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거나 지금이 과거보다 부족한 게임 경험을 준다는 식의 우열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경험이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도록 동일하지는 않으며 오직 고객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라고만 해석하면 발전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생각합니다. 마치 전설적인 게임디자이너들이 고객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보호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우리들 스스로가, 그리고 고객들이 이전의 게임 플레이 경험과 현재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비교해 어느 쪽을 더 낫다고 평가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우리들의 디자인에 반영할 방법을 찾아야 우리들의 임디자인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과거를 돌아보고 회상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다고 말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취향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고객들이 과거의 경험을 미화하고 현재의 경험을 거부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상의 고객이 과거에는 커다란 월드에서 오직 마을과 마을 사이를 걸어서 이동하는 것 만으로도 재미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이런 플레이를 제시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과거에는 게임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처럼 게임 외에도 소비할 수 있는 컨텐츠가 엄청나게 많은 환경이 아니었고 또 컨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 컨텐츠를 능동적으로 소비할 만큼의 에너지가 더 있었거나 그런 에너지가 있는 나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직 걷기만 하는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세계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세계의 규칙과 이 세계의 가능성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세계의 목적이 현대처럼 성장, 다른 플레이어와 경쟁, 상위 컨텐츠 플레이 같은 식으로 개발사가 꽉 짜 놓은 것들로 한정된다면 고객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걸어가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골드를 지불하고 순간이동해 시간을 절약한 대신 순간이동 하지 않는 플레이어들에 비해 더 빨리 성장하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PvP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마당에 마을과 마을 사이 이동을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과거의 게임에 PvP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게임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지금 마을과 마을 사이 숲 속에 모닥불을 피우고 시간을 낭비하며 다음 마을로 이동한 다음 이어서 해야 할 성장 과정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당장 내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선형으로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게임 곳곳의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게임을 플레이 하는 시간 조각조각을 더 흥미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대에는 게임이 우리들의 행동을 더 강하게 유도합니다. 마을 사이를 이동할 때 중간에 멈춰 딴 짓을 하며 게임 세계를 즐길 방법을 아예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플레이어의 진행과 차이를 선형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해 내가 그 성장 과정을 따르지 않으면 게임 속에서 직접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뒤쳐짐을 체감할 수 있도록 설계하곤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이에서 내가 딴 짓을 하며 노는 모습은 나 자신에게도 별로 좋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지나가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에도 이 사람은 도대체 게임 안 하고 여기서 뭘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나 미래에는 과연 과거의 좀 더 느슨하고 게임 세계 자체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내 플레이를 선형으로 비교하지 않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요? 또 고객들이 어떤 게임을 그런 게임이라고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정확한 방법은 아직 모르겠지만 힌트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게임 안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성장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의 전투력은 이해하기 쉽고 또 비교하기도 쉽지만 모든 플레이어들의 성장 과정을 직선 상에 나열하고 각자의 현재 위치를 너무 극명하게 비교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만든 의도를 너무나 잘 달성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게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제한함으로써 게임을 더 넓고 다양하게 플레이 할 기회를 없애 버리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게임디자인 입장에서 여러 가지 성장 과정과 가능성을 만들고 이를 고객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게임 상에서 서로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어렵게 만들고 이를 통해 각자의 플레이가 의미 없이 느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게임의 여러 보조 시스템들이 이 게임이 선형으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지 않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현대의 전투력이 고안되기까지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고 전투력 덕분에 해결한 수많은 문제들이있지만 오직 이 값 만으로 플레이어들을 비교하게 만들면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전투력을 비교하고 전투력이 높은 사람이 승리하는 성장과 비교 과정으로 인식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비교 과정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거나 비교할 방법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 서로를 비교하기 어렵게 만들어 서로의 행동이 의미 있는지, 혹은 의미 없는지 자체를 판단하기 어렵도록 설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 하다 보니 말이 상당히 모호해졌는데 핵심은 과거에 좀 더 느슨한 플레이를 통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었지만 현대에 그렇지 않은 이유에는 고객이 게임을 받아들이는 자세로부터 기인하며 이 자세를 이끌어내는데는 성장 수준을 선형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과거에 했던 플레이처럼 고객들이 서로 다른 플레이를 성장의 높고 낮음이 아닌 다양한 성장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게임디자인 측면에서 고객들이 게임을 선형으로 성장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방식으로 설계한 게임이 아님을 게임 시스템이나 인터페이스, 그리고 플레이로부터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