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 프리오더를 취소했습니다.

작년 연말에 ’코인‘이라는 제품이 개발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디어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지갑에 들어있는 마그네틱 카드 여러 장을 카드 한 장에 저장한 다음 카드를 사용할 때 원하는 카드로 설정을 바꿔 결제를 하는 겁니다. 아이폰 앱과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카드 정보를 전송하고 관리하며 블루투스 연결이 끊기면 알아서 비활성화되는 보안 기능도 갖췄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반 년 전에 프리오더를 받을 때에는 제품 개발은 다 되어 가는데 대량생산을 하기에는 돈이 좀 모자라니 $50을 내면 2014년 여름 즈음에 제품을 보내주겠다고 했었습니다. 국내에서 사용 가능할지 확신이 없었지만 마그네틱 카드는 호환될 거라고 생각했고 만약 신용카드를 복사하는데 따르는 법률에 걸려도 내가 내 카드를 복사한 것이니 구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철컹철컹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제품을 주문했습니다.

그 후 대략 아홉 달이 지나는 동안 이따금씩 'Backer Update'라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진행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앞으로 계획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개발 중인 프로토타입 사진을 봐. 잘 만들고 있지만 작업이 좀 남아 있어“, “코인의 보안 시스템에 대해 소개해줄께” 같은 내용을 담은 페이지 링크도 포함했습니다. 이렇게 십여 차례 메일을 받는 사이에 얼마 전부터 메일에 링크된 페이지 하단에 있는 답글란에 두어 가지 걱정스러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일단 2014년 여름이 다 끝나 가는데 여전히 베이에어리어에서 베타 테스트 중이라는 것과 코인이 마그네틱 카드만 복사할 수 있기 때문에 EMV 카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전자야 말 그대로지만 후자는 여러 가지로 걱정스러웠습니다.

’EMV'는 기존 마그네틱에만 의존하던 신용카드 인증 과정에 내장된 프로세서 처리를 추가하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국내에서도 이미 ATM이 전부 교체되어 마그네틱만 있는 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마그네틱 카드는 일반 가게에서 결제하는데 사용하는 정도입니다. 몇 년 전에 유럽에 갔을 때도 같은 카드를 내밀 때 마그네틱으로 결제하는 곳과 EMV 방식으로 결제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후자는 이미 단말기에 두 가지 타입 모두를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마그네틱 카드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었지만 코인 홈페이지에 있던 답글들로부터 미루어 미국 역시 2015년 10월까지 신용카드와 신용카드 단말기를 교체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상인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교체 비용 문제로 자신은 2015년 10월 이후에는 현금만 받을 예정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ATM에서만 EMV 카드를 사용하고 있고 그 외에는 마그네틱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서 당분간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마그네틱 결제를 없애겠다는 이야기를 아직까지는 듣지 못했고요. 오히려 티머니 같은 시스템이 먼저 등장했고 어지간한 대중교통은 별도 교통카드 시스템을 통해 결제하고 있으며 요즘에는 택시에서도 마그네틱 방식 대신 EMV 방식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고 당분간 이 상태가 깨지지 않을 테지만 추세로 미루어 한국도 머지 않아 마그네틱 결제 방식에 직접적인 제한을 걸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은 마그네틱만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미국의 사례는 남 일로 봤습니다.

그러다가 토요일날 받은 메일 덕분에 좀 혼란스러워졌고 과연 홈페이지의 답글은 폭발해 있었습니다. $50을 낸 사람들이 답글을 달고 있을 답글란에 글이 몇 천 개나 올라왔습니다. 문제는 메일 내용이었습니다. 메일에서 코인 베타 프로그램을 베이에어리어에 한해 진행해 왔는데 아무래도 미국 전역에 걸친 베타테스트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품 출시를 2014년 여름에서 2015년 봄으로 연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연기니 그런가보다 했습니다만 이제부터 시작되는 전국적인 베타테스트에 참여하는 사람은 실제 출시되는 제품을 70% 할인한 $30에 판매하며 그 후 3년간 제품을 재구입할 때마다 50% 할인을 해 주겠다는 점은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베타테스트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할인 없이 제품을 $100에 구입하라는 이야기였는데 그런 설명을 제외한 채로 베타테스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니 답글 란이 폭발할만 했습니다. 게다가 2015년 10월이 다가오는 가운데 제품 출시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실 사용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흔한 발매연기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만약 $50에 코인을 프리오더한 프로그램이 다른 크라우드 펀딩 형태였다면 말 그대로 펀딩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었고 딜레이에도 지금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별다른 예고 없이 우회적으로 추가금을 요구한 점은 황당하지만요. 하지만 사람들이 참여한 프로그램은 리워드가 걸린 크라우드 펀딩이 아니라 실제 제품에 대한 프리오더였습니다. 사람들은 주요 스탭의 트위터와 회사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소프트테크 VC를 공격했고 하루만에 해명 메일을 다시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존 'Backer’ 프로그램에 $50을 내고 참여한 사람들이 오픈 베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추가 비용이 필요하지 않으며 현재 프리오더 프로그램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 그리고 기존 베타테스트 대상을 50% 더 늘린 15000장으로 테스트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사이사이에는 온갖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상황 설명이 이어졌지만 정보만 놓고 본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는 정도의 메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바로 이어서 베타테스트 참여 메일이 날아왔고 앱 다운로드는 이달 말로 예정되어 있지만 저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관계로 테스트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메일 끄트머리에는 이번 일로 환불을 원하는 사람은 메일을 달라고 적혀 있었고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두어 가지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프로젝트를 운영함에 있어 잠재 고객들에게 현재 상황과 계획을 어떻게 공유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코인이 작년 말에 시작한 프로그램은 '펀딩'이 아니라 '프리오더'였고 사람들은 진행상황과 함께 실제 제품을 받게 되는 날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정보를 제외한 나머지 베타테스트에 사용된 카드, 사무실 풍경, 카드리더 수 십 대 사진을 보여줘도 큰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원래 진행한 프로그램을 아무 안내 없이 메일 한 방에 수정한데다가 추가 금액 요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품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아이폰에 카드리더를 붙여 카드를 읽혀 이 정보를 블루투스 LE를 통해 카드에 전송한 다음 전송된 카드 정보를 카드 한 장만 들고 다니며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제품이 집중하고 있다는 미국에서조차 곧 마그네틱만 사용하는 카드를 사용하기 어렵게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제품 개발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제품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50은 적은 돈이 아니고 어제오늘과 같은 상황을 거치면서 회사와 제품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고 또 VC가 돈을 내고 있으니 $50을 뺀다고 당장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만 발을 빼기로 했습니다. 제품 개발을 처음 시작했다는 2012년이라면 분명 훌륭한 제품이었을텐데 2015년을 목전에 둔 지금은 발을 담그고 구경하기보다는 강 건너로 자리를 옮겨 구경을 계속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