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기억

결론: 외부기억장치와 의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이십여년이 흐른 현재 자신이 외부기억장치에 적극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게임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이를 다루는 도구 또한 발전했습니다. 체인 라이트닝 스킬을 만들기 위해 2차원 엑셀데이터시트에 숫자를 기입하며 머릿속으로 1타, 2타, 3타와 각 타격에 발동할 체인 스킬의 연결을 시각화하는 고도의 노동을 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모니터 속에 시각화된 스킬 데이터구조와 이에 따른 실제 엔진 상의 동작을 실시간으로 프리뷰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데이터는 엑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끔 엑셀에 요구하는 데이터 가공 기능은 엑셀이 인라인 수식 에디터에서 제공하는 기능을 초과할 때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이런 상황을 안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종종 인라인에디터보다 좀 더 확장된 코드에디터가 필요해집니다.

게임디자이너들이 엑셀 개발사가 제공하는 현대적인 개발환경을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라이선스가 오피스만큼 단순하지 않고 이를 검토하기도 어렵습니다. 덕분에 VBA 에디터가 지금도 현역입니다. 정말 웬만하면 이 환경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엑셀 기준으로는 잘 통합되어 있지만 요즘 세상 기준으로는 디버깅하기도 어렵고 실수하기도 쉬우며 엑셀 파일에 함께 저장되어 소스를 관리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엑셀파일과 분리된 다른 개발 스택을 통해 엑셀에 접근하곤 합니다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 생겼습니다. 팀 내에서 엑셀 파일을 사용할 스탭이 엑셀 함수에 통합된 형태를 원하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연휴 직전이라고 다들 집에 일찍 가고 몇 명 안 남은 사무실에서 VBA 코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웬만하면 회피하고 어쩌다 한번 하는 VBA 코딩은 시작부터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조건문에 '=' 문자를 하나만 쓰던가 두개 쓰던가, 괄호를 치던가 안 치던가, 'ElseIf'던가 'ElIf'던가, 이 스트링 검색 함수는 첫번째 인자가 검색할 문자던가, 아니면 두번째 인자이던가 등등 기억나는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구글에 몇 글자 입력하면 심지어 엔터 키를 누르기도 전에 연관검색어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포함한 검색어가 나타나 검색을 할 필요조차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문제가 있었는데 사무실에는 사람이 줄어들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인터넷이 느렸기 때문입니다. 연관검색어는 잘 나타나지도 않았고 엔터룰 누르고 십 몇 초쯤 기다려야 결과가 꾸역꾸역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검색결과를 클릭하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사이트가 로딩됐습니다.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위에 이야기한 것들은 물론 엑셀 워크시트 객체에 메소드를 사용하기 전에 세팅해야 할 값 목록을 기억해내지 못해 자동완성에 나타난 메소드 이름을 방향키로 하나씩 읽으며 찾기 시작했고 변수나 함수이름에 쓸 영어 단어를 바로바로 떠올리지 못해 영어사전 웹사이트를 타이핑해놓고 로딩이 늦어 빈 페이지가 나타난 화면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됐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스택오버플로우에 검색된 소스코드를 붙여넣고 내 코드에 맞춰 돌아가도록 여기저기 손보면 금방 끝날 문제를 내 머릿속 저 깊은 곳 어딘가에 남아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기억 조각들을 더듬어 식은땀을 흘리며 타이핑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회사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은 내 아이폰에 항상 붙어있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끄집어내 검색하고 그 결과를 다시 회사 컴퓨터에 연결된 키보드에 타이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작업이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고 퇴근하기 전에는 처음에 생각하던 기능 일부가 돌아가는 상태까지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사람이 순식간에 쓸모없어졌습니다. 오래전에 본 애니메이션에서 외부 기억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거 괜찮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세월이 흘러 내가 그런 사람이 됐을 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다가 막상 뇌와 인터넷 사이 연결이 끊어지고 순전히 내 뇌만으로 행동할 순간이 오자 자신이 얼마나 인터넷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지 문득 깨달았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파촉, 삼만리의 상황이 생각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