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시뮬레이션

결론: 옛날 옛적에 게임을 플레이하던 사람들이 흔히 '자동사냥'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현대에 '경영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가리키는 낡고 잘못된 표현입니다.

경영시뮬레이션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국내시장에서 주류와 다른 게임 장르를 찾기 좀 어려우므로 오래된 경영시뮬레이션 게임 이야기로 시작할 작정입니다. 항공사를 운영하는 게임인데 비행기를 구입하고 이를 기반으로 노선을 구축하고 취항을 하고 상품을 개발해 이윤을 내 다시 이를 재투자하기를 반복해 경쟁사들보다 앞서 나가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매 턴마다 이번 분기에 수행할 내 행동을 결정합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직원을 고용할지 비행기를 구입할지 적자 노선을 정리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이 결정을 인터페이스를 통해 입력합니다. 어떤 결정은 결과를 바로 볼 수 있지만 결정의 상당수는 턴을 진행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고약한 결정은 턴을 여러번 보낸 다음 게임 속 시간으로 몇 년이 흐른 다음에야 알 수 있을 때도 있습니다. 아, 그때 그 지역에 취항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같은 후회를 해도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습니다.

이 게임은 비행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나에게 비행기 조종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런 게임이 아닙니다. 비행기는 자동으로 목적지를 오가며 그나마 날아가는 비행기를 볼 기회는 신규 노선에 취항한 후에 몇 초 동안 활주로로부터 이륙하는 영상이 나오는 순간 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상황에서 비행기는 아이콘으로 표시됩니다. 나는 비행기를 사고, 팔고, 노선에 취항하거나 노선을 정리하는데 사용할 수 있지만 콕핏 근처에도 갈 일이 없습니다. 이 게임 장르는 경영시뮬레이션이고 이 정의를 벗어나는 일을 기대하지도 않고 또 게임이 나에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액션롤플레잉

작년 언제쯤인가 출시된 MMO 게임이 하나 있었습니다. 출시할 즈음에 플레이어에게 조작을 요구하며 조작을 재미있게 잘 만들었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출시된 같은 장르의 다른 게임들과 비교해 확실히 효율을 올리기 위해 나에게 지속적인 조작을 요구했습니다. 예상할 수 있지만 조작은 고객들을 순식간에 피곤하게 만듭니다. 게임의 성장구조는 이런 특징과는 달리 지속적인 반복 플레이를 강하게 요구했고 고객들이 게임에 남아 버티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찾아보니 아직 매출순위표에 있기는 한데 너무 아래에 있어 의미있게 먹고살 수 있는 한계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장르 게임을 개발하는데 상당한 비용이 드는 점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기분이 먼저 듭니다.

이상한 키워드

자동사냥이란 키워드가 심각하게 개발자들 사이에 오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롤플레잉 장르를 만들던 시대였는데 그 시대에는 이 기능이 일종의 터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게임에서 처음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고 고객들이 여기에 적응했습니다. 실은 이미 여기서 논란은 끝났습니다. 고객이 요구하는 기능을 과거에 이 기능을 터부시했다는 이유로 게임의 근본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미적거릴 시간이 있다면 일단 자동사냥을 도입하고 이 기능이 게임에 미칠 영향과 그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보는 편이 나았습니다. 실은 이미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이전 시대로부터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해 현대에 이른 몇몇 독자들을 구매층으로 삼는 웹진에서 이런 철 지나간 이야기를 가끔씩 끄집어내 수익을 늘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 관점을 약간 바로잡아 보려고 합니다.

잘못된 장르 정의

사람들은 쉽게 시각에 현혹됩니다. 가령 흔해빠진 금속 장갑을 온몸에 두른 캐릭터가 자기 신장보다 긴 칼을 휘두르며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발작을 유발할 수 있어 보이는 번쩍이는 이펙트를 뿌리며 연약한 몬스터를 두들겨패는 게임은 누구나 쉽게 액션 롤플레잉 장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 장르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떠올리고 이를 게임에 기대하고요. 하지만 현대에 이런 영상을 봤다고 해서 이 게임의 장르를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자동사냥 기능이 있는 게임을 롤플레잉이라고 착각하지만 이 게임의 장르는 경영시뮬레이션입니다. 현대에 매출순위 상위권에 있는 게임들이 이와 비슷합니다. 외형은 분명 오래된 액션 롤플레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이 장르처럼 꾸민 경영시뮬레이션입니다. 게임의 목표는 내 캐릭터나 내 캐릭터들을 육성해 세계 속에서 강한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 캐릭터가 장착한 아이템을 강화하고 강한 플레이어들이 모인 길드에 가입하고 이들과 함께 상위 컨텐츠를 플레이하고 이로부터 다시 보상을 얻기를 반복합니다. 다만 이 과정의 일부가 자동으로 수행되며 유저는 누군가 했던 말처럼 흥미롭고 의미있는 결정이 필요한 성장의 순간이나 성장의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개입해 내 캐릭터의 앞으로 수 십 시간에 걸친 플레이를 결정합니다.

현대의 인기장르

현대에 자동사냥이란 말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플레이하는 롤플레잉처럼 보이는 게임은 더이상 롤플레잉이 아니라 경영시뮬레이션이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이야기한 항공사 경영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나에게 항공기를 직접 조종하게 하지 않고 이 점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시각적으로 액션 롤플레잉 게임처럼 보이는 현대의 게임들은 이미 장르가 전혀 다르므로 고객에게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 물론 가능하게는 만들어 놓지만 - 이 점이 크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간에 이야기한 경영시뮬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만든 게임의 장르를 액션 롤플레잉으로 착각해 항공사 경영시뮬레이션에 항공기 조종을 넣는 자기파괴적인 결정을 내려 고객들로부터 외면받는 결과를 마주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