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에 세계를 떠나지 못하다

작년 한해 동안 가장 감명깊게 한 게임은 어쎄신 크리드 오딧세이입니다. 이렇게 멋진 세계를 경험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전작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등대 위에 올라가 석양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도시에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황홀하게 바라봤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황홀함으로 가득한 세계를 만났습니다. 한낮에 눈부시게 내리쪼이는 지중해의 태양, 어두운 밤에도 반짝이는 하늘과 안개낀 숲, 바다 위에서 맞이하는 연보라빛으로 물든 여명, 그 안을 가득 채운 지금과는 다른 시대의 건물과 사람들. 저에게 이 세계는 그저 말을 타고 목적없이 달리기만 해도, 또 함선을 타고 밤낮없이 떠있기만 해도 즐거운 게임이었습니다. 직업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고 앞으로 참여할 게임에 기여할 여러 가지 방법을 다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세계에도 끝이 옵니다. 세계를 위협하던 코스모스 교단원들은 코스모스의 유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코스모스의 유령은 카산드라의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이제 유령이 세계에 살아남아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전적으로 제 상상에 달렸습니다. 유비소프트가 조앤 롤링처럼 원작자피셜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면요. 거의 모든 동업자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이 세계에는 극소수의 용병들만이 살아남아 오가며 서로를 위협할 뿐입니다. 세계에 흩어져있던 수많은 신비로운 동물들 역시 카산드라의 칼 끝에 세계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함선의 재료가 되어 드넓은 바다를 떠다니게 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 다리우스와 만나야 하고 눈먼 왕에게 인간이 이룩한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모두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시즌패스 덕분에 앞으로 한동안 세계에 추가될 또다른 이야기들은 아직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100시간도 넘게 이 게임을 플레이한 지금 슬슬 게임을 삭제하고 한동안 이 게임을 쉬고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이에 출시된 다른 게임을 충분히 플레이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에 국내에서는 거의 진공상태이던 PC 시장에 흥미로운 게임이 출시되었으며 모바일게임은 또 시시각각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세계를 떠나 다른 게임을 시작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정이 든 나머지 세계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스팀에서 게임을 삭제하려다가 문득 게임을 실행해버렸습니다. 딱히 무슨 퀘스트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포보스를 불러 올라탄 다음 그저 거대한 도시를 가로질러 성 밖으로 나가 산길과 호수와 염전과 대리석 광산과 숲을 달립니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이 금빛으로 빛나 눈을 뜰 수 없게 만들고 가벼운 구름이 저멀리 떠갑니다. 그러다가 항구에 다다르고 이번에는 목적없이 함선을 타고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봅니다. 어두운 밤에 뱃전에 매달린 불빛과 선원들의 노래에 멍하니 키를 맡겨보기도 하고 연보라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새벽녘의 하늘과 바다가 맞닺는 순간을 지켜봅니다. 목적이 사라졌지만 이 세계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에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건 로스 산토스에서였는데 그때는 그 세계에 저지른 제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출시된지 5년도 넘었으니 이제와서 고백하자면 저는 이 도시에서 결국 트레버를 죽였습니다. 가솔린에 휩싸여 울부짖으며 불타 죽었죠. 그렇게 목적이 사라진 세계를 떠나려다가 그때도 삭제하는 대신 실행해버리고 말았는데 바이크를 타고 신호대기에 서있는데 인도를 걸어가는 마이클을 만난겁니다. 잘 살라고 인사한 다음 갈길을 가려다가 문득 이전에 플레이한 미션을 다시 플레이할 수 있었다는걸 깨닫고 트레버를 죽인 그 결정을 한 미션을 다시 플레이해서 이번에는 트레버를 죽이지 않는 선택을 해봤습니다. 마지막에 석양을 배경으로 아저씨 셋이 호탕하게 웃고는 각자 갈길을 가는 엔딩을 보고는 기분이 좋아졌다가 로딩이 끝나자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전환되지 않는 트레버 메뉴를 보며 이 세계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를 떠날 겁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떠나는 순간이 이렇게 아쉽고 괴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앞으로도 또 이런 세계를 만나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