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할라

엊그제 어쌔신크리드 신작 영상을 봤습니다. 이제 이집트 말기와 그리스 시대를 거쳐 바이킹들의 시대로 갑니다. 영상은 전체가 시네마틱입니다. 실제 게임 장면은 단 한 장면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게임들이 시네마틱 광고와 실제 게임 사이에 거대한 갭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분명 시네마틱에서는 좀 더 많은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실제 게임은 시네마틱과는 1억광년쯤 떨어진 제한되고 갑갑한 플레이만 할 수 있는 일이 흔합니다. 그런데 어쌔신크리드 발할라 시네마틱은 그런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미 전작들로부터 이 시네마틱의 각 부분들을 어떻게 플레이할 수 있을지 충분한 힌트와 신뢰를 쌓아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전작을 출시한 시점으로부터 아직 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이들의 신작 트레일러를 보고 이 게임이 출시될 즈음에 대비해 휴가를 충분히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두 가지가 부러웠습니다. 너무 부러워서 열받습니다. 하나는 신뢰, 다른 하나는 프로젝트의 연속성입니다.

신뢰

신작 트레일러는 실제 게임 플레이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들끼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에이 저거 다 사기잖아요. 저 시네마틱 중에 실제로 플레이와 관련된 장면은 단 하나도 없을 거라고요. 시작할 때 검게 하늘을 뒤덮는 드래곤과 싸우며 드래곤과 나 사이에 있는 성들이 박살나고 불타오르는 폐허 가장자리를 이리 저리 건너뛰며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칼을 휘두르는 시네마틱은 곧 식상한 카메라 시점에 저 앞에 깜빡이는 목표지점까지 이동하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스킬 버튼을 터치해 제한된 뷰 안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뻔한 플레이로 바뀌는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면 꽤 많은 비용을 들여 제작했을 것 같은 광고용 시네마틱 앞에 감흥이 없어지고 '아이구 이분들 또 헛돈 썼구만'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보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바다를 가로지르는 저 장면이 게임에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습니다. 전작에서 그렇게 바다를 가로질러봤거든요. 그 바다를 떠다니는 경험은 정말 괜찮았습니다. 잉글랜드의 병사들과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전투를 벌이는 전장 한복판에서 내가 상대를 찾아 전투를 벌이는 경험이 어땠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저 강력한 기사 뒤로 빛나는 저녁 해가 정말로 저렇게 반짝이며 또 그와 어떻게 싸울지, 배를 몰아 육지에 다다를 때 아름답게 빛나는 저 모습이 정말로 게임 안에서도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배경의 새로운 게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네마틱의 각 부분들이 실제 게임의 실제 플레이와 아주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느 시네마틱과 다르게 영상을 보며 큰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예약 주문 가능하게 되면 당연히 시즌패스를 포함한 전체 버전을 구입할 생각입니다. 이 선택은 전작, 전전작에서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고 이번에도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닐 것이며 50에서 100시간쯤을 신나게 보낼 수 있는데 비하면 그리 큰 금액도 아닙니다.

연속성

전작을 발표한 시점으로부터 아직 만 2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연말 즈음에 출시할 모양이니 실제로는 2년보다 더 긴 시간동안 개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만 전작들로 미루어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이전만한 스케일로 게임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합니다. 이 정도 시간을 들여 이 정도 완성도와 스케일을 가진 게임을 개발한다는건 우리들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그 근처에도 갈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개발을 반복한 락스타조차도 신작의 출시 시점 스케일을 고민하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떻게 이런 업적을 달성하는지 최소한의 방법을 이해합니다. 일단 서로 다른 여러 스튜디오에서 게임을 번갈아가며 개발해 비즈니스 관점에서 유효한 출시 시점을 유지하고 한 프로젝트에서 개발한 개발경험, 구현체, 도구, 에셋을 다음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겁니다. 거대한 스케일의 도시를 더 빨리 만들기 위해 반복되는 건물 벽을 자동으로 그럴듯하게 칠하는 브러시를 개발하고 레벨디자인과 퀘스트라이팅 작업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도록 도구를 개발해둡니다. 이 도구들은 다음 프로젝트의 출발점에 이미 완성되어 있고 아마도 새로운 프로젝트의 요구사항에 맞춰 적당히 튜닝될 겁니다. 바닥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테고 비교적 짧은 개발기간 동안 더 많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

우리들의 생산성이 그렇게 낮지 않고 또 우리들의 개발 수준이 그렇게까지 낮지는 않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다른 유명한 개발사들이 종종 공개하는 자신들의 고민과 해결방법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그들은 고객들의 기억에 남을 게임을 만들고 우리는 종종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다 고객들의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그 기억이 긍정적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고객들에게 우리가 만든 게임은 이전의 다른 게임들과 별로 다르지 않고 또 비즈니스 관점에 지나치게 매몰된 결과물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비슷한 게임을 비슷한 수준으로 개발하는 근본 원인은 우리가 항상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서로 일해본 적 없는 사람들과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점입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우리들의 고용도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스폰서를 찾아 새로 팀을 꾸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전 프로젝트나 이전 회사와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가장 간단한 기능조차도 바닥부터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만들어봤고 또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거의 정답을 만들어낼 수 있을 법한 데이터 파이프라인부터 시작해서 이런 장르 게임에는 당연히 있을법한 모든 시스템을 처음부터 설계하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합니다. 게임을 완성할 때까지 스폰서가 기다려줄 수 있는 시간과 돈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바닥부터 만들기 시작해 이 기간 안에 완성한 게임의 수준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새로 출시되는 여러 게임이 항상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개발 중에 이전 경험으로부터 나온 개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의 관점에서, 또 비즈니스 관점에서 여러 개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이런 개선은 항상 새로 구축한 그리 단단하지 않은 시스템 위에서 부족한 고민과 시도에 의한 낮은 평가를 받습니다. 당연합니다. 개발기간 대부분을 다른 게임과 비슷한 수준을 갖추는데 사용하고 그 사이사이에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개선이 시장이나 고객들의 눈에 만족스러울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우리는 신뢰를 잃었고 신뢰를 구축한 프로젝트와 그렇지 않은 프로젝트 사이에 거대한 갭이 생겼으며 신뢰를 다시 구축하는데는 신뢰를 잃으며 보낸 기간보다 더 긴 기간이 필요해졌습니다.

결론

우리들 각각이 이 상황을 개선할 방법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프로젝트가 중단되어 우리들의 고용이 사라지기 전에 최소한 같은 회사 안에서 같은 사람들이 새 프로젝트를 계속해 법적인 문제를 최소화하는 범위 안에서 이전에 구축한 최대한 많은 구현물과 에셋들이 새 프로젝트에 이어지도록 행동하는 것이 당장 개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다음은 스폰서나 회사 차원의 과제가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