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싼 상품과 신뢰

매주 글 쓰는 날을 통해 쓴 글은 예약에 따라 차츰 공유되는데 이번에는 2022년 10월 경에 쓴 '멍청한 엘리베이터 사용기'가 글을 쓴 지 약 4개월 만에 트위터를 통해 공유 되었습니다. 글을 쓸 때만 해도 이 건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편 없는 엘리베이터에 거의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여러 번 씩 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며 화가 치밀어 이런 제품을 돈 받고 파는 자들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며 건물에서도 입구 밖으로 길게 늘어선 엘리베이터 대기 줄을 보며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꼈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모듈을 구입해다가 설치해 엘리베이터가 서로 연동되어 동작하도록 하고 또 저층부와 고층부를 구분해 운행해 최악의 상황보다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한편 사용 인원이나 도달 시간과 관계 없이 단순히 저층부와 고층부로 나눠 운행하는 운행 시스템은 여전히 전혀 훌륭하지 않아 보입니다. 또한 엘리베이터의 온갖 이상한 동작 방식은 이 비싼 땅에 건물을 올리면서 고작 이딴 엘리베이터를 선택한 건물주의 의식에 따라 홍수에 취약할 것이라거나 지진이 일어나면 결코 안전하지 않으리라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에 도달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한편 이 글이 공유된 다음 받은 의견 중에는 이 선택을 한 것은 돈을 아끼려는 건물주인데 저를 포함한 사용자들은 엘리베이터 제조사를 욕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건물주는 비난 받을 걱정 없이 계속해서 가장 싼 엘리베이터를 선택하게 되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미 설치가 끝난 엘리베이터를 되돌릴 수 없으니 엘리베이터 제조사를 욕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고 또 이 엘리베이터를 선택했을 누군가를 욕해봐도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그 순간에 직관적으로 엘리베이터를 만든 제조사를 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다른 건물들도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까지 멍청하게 동작하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평생 타 본 어떤 엘리베이터도 이렇게 까지 후지지는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가장 싼 상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정말로 그런 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품을 설계할 때 고객이 선택하기를 원하는 상품 주변에 너무 싼 상품과 너무 비싼 상품을 배치해 고객이 너무 싼 걸 선택하긴 좀 그렇고 또 너무 비싼 걸 선택할 결정을 하기도 좀 그런 상황을 만들어 그 중간에 있는 나름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상품을 선택하게 만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이 어떤 이론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실험 사례가 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상품을 설계할 일이 있는 입장에서 나름 직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서 종종 상품을 설계할 때 이 생각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분명 판매하기를 의도한 그 중간 상품 대신 가장 싼 상품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상품은 분명 중간 가격대 상품을 팔기 위한 미끼 상품이지만 분명히 실제 구입 가능한 상품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이 상품을 선택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가장 싼 상품은 판매하기를 의도한 중간 가격 상품이나 가장 비싼 상품과 비교해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할까요.

어떤 시대에는 아무 옵션이 없는 소위 ‘깡통차’에 안전을 위한 자세제어 기능이나 감속보조기능이 빠지기도 하고 또 요즘에는 거의 생존에 직결되는 에어컨 같은 그 시대에는 편의 기능에 가까웠던 항목들이 빠져 있었던 것 모양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법률이 변경되어 아무리 옵션이 없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포함해야 했고 현대 한국의 기후를 고려해 아무 옵션이 없더라도 최소한 에어컨 정도는 달려 있습니다. 최소한의 안전과 최소한의 생존과 최소한의 편의 기능은 아무리 가격이 낮은 상품이라 하더라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멍청한 엘리베이터는 어쩌면 최소한의 안전과 최소한의 편의 기능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케이블이 망가져도 바로 추락하지 않는 수준의 기계적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을 테고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원하는 층으로 이동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출발하기 전에 문이 닫히고 또 완전히 도착한 다음에야 문이 열리기는 합니다. 물론 종종 문이 열리고 보니 엘리베이터가 정위치에 정차하지 않아 턱이 생기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런 옵션을 만들어 놓는 것이 과연 상품과 상품의 제조사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엘리베이터를 선택할 권한이 있는 누군가는 계속해서 가장 싼 상품을 선택해도 직접 지난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계속 할 겁니다. 제조사 역시 이런 선택을 하는 고객이 있는 이상 이런 수준 미만의 상품을 계속해서 가장 싼 저리에 남겨 두고 선택할 수 있게 할 테고요.

하지만 가장 싼 제품이 실질적인 사용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태는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퇴근 엘리베이터 안에서 엘리베이터의 어처구니 없는 동작이 일어날 때마다 건물 입주사 직원들의 이야기 주제는 항상 엘리베이터 제조사 이름을 정확히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지방에 어느 번지르르한 숙박을 예약했는데 엘리베이터에 안내 멘트를 듣는 순간 이 엘리베이터가 같은 회사 제품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벽을 보니 과연 그 회사 제품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 제품은 상대적으로 비싼 제품이었던 모양인지 회사에서 늘 경험하던 그런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동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엘리베이터가 같은 회사 제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엘리베이터가 항상 경험했던 것처럼 정 위치에 정차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고 매번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또 그런 엘리베이터를 선택한 그 호텔을 다시 예약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엘리베이터를 선택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 엘리베이터에 어떤 사람들이 탈 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엘리베이터 제조사 역시 의사결정자가 중요할 뿐 실제 탑승할 사람들은 고객으로 여길 필요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가장 싼 제품이 사용자들의 신뢰를 깨기를 반복할 때 과연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을지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어쩌면 아무 영향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