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저작도구와 개발의 민주화
한창 엄청 더울 즈음에 메타버스 저작도구를 개발하시는 분과 이야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구축한 시스템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하며 그 안에서 창의력을 발휘해 게임을 제작하는 요령을 교육함과 동시에 현재 구축된 기능을 조합해내지 못하고 어설프게 조합된 새로운 기능을 발주하려는 시도를 막고 이를 우리가 가진 기능의 조합으로 가이드하는데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는 메타버스 저작도구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 관심은 지금 제가 속한 프로젝트에서 사용중인 제작환경과 비교해 어떤 특징들이 있고 또 어떤 연구할 부분들이 있는지 힌트를 얻음과 동시에 만약 이 저작도구를 개발하는 일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보다 매력적이라면 슬슬 한 프로젝트에 사용할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상황을 충분히 활용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시간만에 끝나고 더이상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 머릿속에 빨간불을 켜는 단어 두 개가 나타났기 때문인데 하나는 메타버스 그 자체. 저는 게임을 만들던 사람이라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게임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하는데 메타버스 관점에서 게임, 특히 MMO 장르 게임은 가상의 공간과 이 공간이 동작하는 규칙을 동시에 제공하는 제품입니다. 이에 비해 메타버스는 가상의 공간을 제공하고 이 공간이 동작하는 규칙을 고객들이 확장 가능하게 만든 제품입니다. 규칙을 확장하는 부분이 얼마나 유연하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냐에 따라 이 가상공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거나 그렇지 않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타버스에 대한 설명은 비용을 지원받는데 사용할 법한 예쁜 단어들로 채워져있었고 저는 여전히 MMO 게임의 관점에서 차이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렇잖아도 개발환경의 한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개발환경이 지원하는 기능 각각을 조합하는 능력이 종종 부족한 스탭들을 교육하는데 슬슬 짜증이 날락말락한 상황이었는데 이건 상황이 더 나빴습니다.
머릿속에 빨간불을 켜게 만든 두 번째 단어는 개발의 민주화였습니다. 이 단어는 게임 쪽에서 종종 자기 주장에 근거를 대거나 자신이 틀렸을 때 인정하지는 않으면서도 많은 권한을 가진 분들이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을 주워담는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낭비하며 실패한 경험만을 반복하던 사람들이 혹할만한 단어입니다만 여러 사람의 그저 그런 머리들을 아무리 많이 연결해놓고 아이디어를 뽑아낸다 하더라도 이들을 필터링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목표에 정렬하고 책임을 지는 강력한 주체 없이 의미있는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개발과정을 민주화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발의 결과물이 유효한 시점에 나올 수 있는지와는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다음 거의 두어 달에 걸쳐 생각해보다가 아이폰 13 발표를 보고 문득 컨텐츠 제작의 민주화라는게 아예 불가능한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조금 해봤습니다. 과거에 사진 촬영은 그 행동 자체에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소수의 텔런트를 가진 사람이나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이 행동 자체에 일종의 권력이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모든 사람들의 주머니에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낮은 비용과 편리한 사용방법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도구가 들어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텔런트가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지만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사진은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 인스타그램 사용자들이 하루 평균 1.5회 포스팅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상황을 컨텐츠 제작의 민주화라고 부른다면 맞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라인 게임, 메타버스 같은 결과물은 사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한 것은 사실입니다. 웹소설, 웹툰, 인스타그램 사진 같은 현대에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해서 만들어내는 컨텐츠들은 단방향으로 동작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인데 비해 게임이나 메타버스는 항상 게임 내 외 요소들이 모두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때문에 이를 사용자가 확장 가능한 모양으로 만들고 이를 사용자들이 잘 사용해내는 선순환과정을 만들어내는 일 역시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아이폰의 계산사진처럼 부드럽게 해결해줄 방법이 있다면 비록 지금은 제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지게 만드는 단어이지만 근미래에는 사진의 사례처럼 그렇지 않을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공간의 제공 및 공간이 동작하는 규칙을 사용자가 확장할 수 있고 이 과정에 사용하는 인터페이스가 다시 공간의 규칙과 일치하는 공간, 세계 또는 메타버스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마인크래프트입니다. 이 정도 확장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저작도구, 이 정도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개발사는 의미없을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개발의 민주화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지게 만드는 사기꾼 식별용 단어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