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유명한 TED 영상을 통해서입니다. 어느 시점에 둘 이상의 차원에 따라 표시한 값들을 그래프에 표시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이분이 값의 변화와 이에 곁들인 각각의 변화가 가진 배경설명이 한 몫 했습니다. 이후 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강연을 보게 됐고 마지막으로 책 팩트풀니스를 보게 됐습니다. 이 분의 부고 기사와 함께요.

책을 읽고 나서 책 겉에 적힌 온갖 찬사와 트위터 타임라인에 지나가는 깊은 인상들에 어느 정도 동의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찬사 속에 내가 알고있는 지식이 현재에도 유효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제 숫자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주장에 깊히 동의하고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가지던 ‘내가 알기로는’으로 시작하는 말을 극도로 삼가고 내가 사실이라알고 있는 어떤 정보를 이야기하기 전에 현재에도 이 정보가 사실에 가까운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관점을 더 깊히 새기게 해줬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3세계 국가의 국민으로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 느낌이 뭔지 잘 설명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이야기할 때 내가 과거에 알고있던 어떤 정보가 현재에 유효한지 항상 살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말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많이 듣게 됐습니다. 내가 이야기할 정보에 자신이 없는 상태일 때가 많았으니까요. 일단 내가 할 말을 부인한 다음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팩트풀니스의 단편적 세계관을 읽고 마치 크렌들러의 별장에서 랙터박사에게 그의 목숨을 흥정하는 말을 내뱉은 스탈링같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3세계 국민인 제 입장에서 마치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초콜릿을 달라며 따라오던 아이들을 바라보는 연합군 군인들의 시각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세계대전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며 우리가 알고있던 세계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며 지나는 잘 닦인 도로, 거창한 유리건물, 나를 몇 분만에 회사 근처의 역까지 움직이는 거대한 철도 같은 사회기반은 이전 세대의 이전 세대가 초콜릿을 구걸하던 시대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던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지금 내가 사는 이 나라와 비슷한 입장에 있던 여러 나라들이 이만큼 달라졌으리라는 것은 사실 그가 보여주는 현란한 발표만큼이나 당연합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소득, 영아사망률 같은 지표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지표들은 그의 방법으로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가 인식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야는 지금 세계의 다양함에 비해 너무 좁다, 아니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세계는 환경오염, 교통사고사망률, 노인빈곤, 우주쓰레기 같은 과거에 세계를 보던 시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미 이런 문제가 너무 당연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옆 나라에 대규모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나던 그 주의 비 내리는 출근길에 황사와 방사능을 걱정하며 ‘황사능’ 조심하라는 인사말을 나누는 세계는 이제 상수도에 접근할 수 있는지, 초등교육을 받으며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비율이 전체의 얼마나 되는지를 보던 시각만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보기에 이 책의 시각은 세계대전으로부터 정보화시대 직전까지 정도를 설명하는데는 어느정도 유용하겠지만 지금 세계가 마주한 과제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그간의 변화를 인정하지만 그 낡은 시각과 그 낡은 관점의 숫자들만으로 예상하는 미래는 더더욱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 책을 읽고 더 단단히 새긴 내가 알고있는 정보를 의심하는 습관과 함께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여전히 제게 의미를 가지지만 책 껍질에 적힌 온갖 유명한 사람들의 찬사와 트위터 타임라인을 지나가는 호평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