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컨 스탠드 매뉴얼은 왜 멸망했나

집에서는 훨씬 더 간단한 모양의 북스탠드를 사용했는데 회사에서 사용할 북스탠드를 고민하다가 영상을 보고 펠리컨 스탠드를 샀습니다. 이미 영상에서도 매뉴얼의 어처구니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영상이 나온 이후 독서대 구조가 한번 업데이트 된 것 같고 매뉴얼 역시 컬러 인쇄된 반들반들한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점심시간 안에 한 10분쯤 쓰면 조립해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시간을 더 쓰게 됐고 중간에 한번은 ‘리어서포트’ 설치를 포기했다가 한 10분 뒤 다시 시도했으며 ‘프랍’이라는 것을 쓸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지 못해 한참동안 좌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영국놈들은 제대로 만드는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뭔가 부조리하고 잘못된게 있으면 일단 영국인들을 탓한 다음에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는 격언마저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컬러로 인쇄되어 있고 각 부품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나름 스탠드의 각 부분의 명칭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신경 쓴 것 같은 매뉴얼은 왜 나에게 이렇게 강한 좌절감을 줬을까요.

‘생소한 용어'

하필 팰리컨 스탠드 조립을 정말 간신히 마친 다음 처음으로 스탠드에 올려놓은 책은 테크니컬 라이터가 되려는 당신에게였습니다. 이 책은 마침 매뉴얼을 잘못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가 있습니다. 또 하필 책을 딱 열자마자 튀어나온 페이지에 이 매뉴얼로부터 받은 좌절감을 설명하는 문장을 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생소한 용어’. 이 제품을 개발하는데 어떤 의사결정들이 어떤 과정에 걸쳐 일어났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면 이 제품을 구성한 이름 모두가 엉망진창입니다. 제품 매뉴얼에 있는 부위별 명칭을 한번 나열해보겠습니다. 이거 매뉴얼에 있는 텍스트를 그대로 입력한 겁니다. 무슨 난독화나 뭐나 그런걸 한 거 아닙니다.

데스크, 누름버튼, 미니프롭, 네크, 프롭, 날개, 베이스, 미니프롭 가이드, 네크 미들홈, 네크 걸림턱, 네크노치 미들홈, 네크노치, 옥스프롭, 베이스 노브, 페이지홀더, 선반받침대, 책선반

사용자에게 최대한 강한 좌절을 안겨주려고 이빨을 꽉 깨물지 않은 이상 이런 괴상한 이름들을 사용했다는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많은 이름 중 ‘책선반’, ‘선반받침대’, ‘페이지홀더’, ‘노브’, ‘날개’, ‘누름버튼'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지구상에 살고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단어들입니다. 제품의 각 부위를 설명해야만 조립과정을 이해시킬 수 있기는 하지만 이쯤 되면 차라리 부품 이름을 안드로메다어로 적어놔도 결과는 똑같을 겁니다. 어차피 헛갈리고 이해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할테니까요. 이 모든 이름들의 문제는 생소함입니다. 적어도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전면 받침대’를 ‘프롭’이라고 적는 패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직각 전면 받침대’를 ‘미니 프롭’이라고 적는 강고함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제품 상자 앞면에 이제는 유럽도 아닌 한때 태양이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국기가 자랑스럽게 걸려있는데 설마 대영제국의 언어를 로마자 표현대로 읽은 결과가 이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이름들이 워낙 생소한 덕분에 매뉴얼에서 이름을 읽은 다음 실제 제품을 한번 쳐다보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게 됩니다. ‘네크노치 미들홈’이란 이름은 특히 조립하다가 '풉' 하고 웃게 만들었는데 이름의 생소함을 느끼기도 전에 하도 어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제품을 만드는데 관여한 모든 사람들은 이 제품의 모든 위치를 매뉴얼에 나온 이름대로 정확히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입사시험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매뉴얼을 처음 본 사람에게는 이건 한글이 아니라 거의 안드로메다어로 적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너무나 생소한 나머지 매뉴얼 상의 사진과 이름을 실제 제품에 대응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이름을 잊어버릴 겁니다. 우리들의 뇌는 이런 이름을 단기작업공간에 저장할 수 있도록 배선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이 매뉴얼의 또 한가지 문제는 사용자들의 공간지각능력을 심각하게 과신하고 있는 점입니다. 아마 제작자분들도 이 제품을 조립해서 사용하려면 각 부분의 이름과 부속품의 이름을 알아야 하고 실제 제품과 매뉴얼을 대응시켜야 할 거라는데까지는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들반들한 종이에 비싼 컬러인쇄를 하고 여기 들어갈 사진도 공들여 찍었을 겁니다. 사진에 부품이 잘 안보일까봐 검정색 제품과 흰색 제품을 섞어 조립하는 공까지 들였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이 제품은 3차원상에서 상당히 복잡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용자들의 공간지각능력은 그냥 한마디로 빻았고요. 룸미러를 보고 후진하다가 옆차를 긁어먹는 사람들에게 이 제품의 구조를 3차원 공간 상에서 떠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매뉴얼은 사용자들이 제작자들만큼의 공간지각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제품 전체를 보여주고 각 부분의 이름을 안드로메다어로 알려준 다음 한 부분을 확대해서 더 자세한 명칭을 안내하는데 놀랍게도 확대한 사진은 방금 전에 본 전체 사진과 구도가 다릅니다! 애초에 이 제품은 원통이나 육면체처럼 간단한 모양이 아닙니다. 조립이 완료된 이 제품의 위상은 오히려 도넛에 가깝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매뉴얼 상의 여러 사진은 매뉴얼에서 설명하려는 동작에 필요한 부분을 잘 줌인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방금 전체 구성을 봤지만 그 밑에 확대된 사진은 방금 본 제품의 어느 부분을 어느 각도에서 찍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황당하고 좌절스러운 상황을 겪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제품 자체인데 일단 이 제품은 좌절감을 딛고 조립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생각외로 잘 동작합니다. ‘후면 지지대’나 ‘전면 지지대’를 함부로 설치하고 나면 높이를 한번 조절하려고 할 때마다 책을 내리고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품을 이리저리 돌려 잘 풀리지 않는 ‘노브’와 씨름하고 거 무슨 노치인지 미들홈인지 네크인지 뭔지 모르겠는 부품들과 한참을 투닥거려야 합니다. 정말 이 디자인이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제품 전체에서 가장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직관적인 디자인인 ‘날개’뿐입니다. 그 외에는 전부 이상합니다. 분명 이 부속들이 모여 동작을 하긴 하고 그 동작이 나쁘지는 않은데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하고 또 이상하고 너무 이상합니다.

이 제품을 추천할 것인가. … 충분히 조용한 곳에서 다른 방해를 받지 않으며 매뉴얼로부터 느끼는 좌절감을 감내할만한 안정적인 정신의 소유자이고 새롭게 안드로메다어를 공부할만한 에너지와 지능이 있으며 별 생각 없이 보조 지지대를 설치했다가 스탠드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이 지지대들을 모두 분리했다가 조립해야 한다는 점에 당황하지 않을 만한 분께라면 추천합니다. 이 모든 조건을 견딘다면 이 제품은 잘 동작합니다. 또 완전히, 정말 ‘완.전.히.’ 잘못 작성된 매뉴얼의 산 표본을 보고싶다면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