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마감

아주 오래 전에 기계를 뜯으려면 나사를 풀고 잘 물려있는 플라스틱 걸쇠를 조심스럽게 밀어내기만 하면 됐습니다. 하다못해 저 악명높은 맥북조차도 나사를 풀어내기만 하면 내부에 접근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온갖 기계들은 내부에 그렇게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접착제로 마감한 덕분에 기계를 뜯으려면 열을 가한 다음 석션컵으로 들어올리거나 기계 가장자리를 망가뜨릴 각오를 하고 마감된 틈사이로 가는 플라스틱 쪼가리를 밀어넣어 비집어 내야 합니다. 하지만 굳이 기계 내부를 뜯을 필요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기계 내부의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구조는 점점 사라졌고 힘들게 내부에 접근한 다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점점 더 잘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서피스 프로 배터리가 부풀어올랐을 때 배터리를 사다가 내가 어떻게든 해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사설수리업체를 검색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어처구니없고 짜증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몇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저는 태블릿과 원노트에 필기하면서 일합니다. 하루에 10페이지 전후의 메모가 생깁니다. 이 메모를 지탱하는데는 서피스 프로 뿐 아니라 작년에 구입한 갤럭시탭을 함께 사용하고 있고 집에서는 아이패드 프로를 사용해 필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서피스 프로는 배터리를 교체했고 아이패드 프로는 최근에 구입했으니 아직까지는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이번에는 갤럭시탭에 문제가 생길 차례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부터 갤럭시탭 뒷뚜껑 구석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배터리가 부풀어올라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벌어진 뒷뚜껑을 눌러보니 튀어나온 곳이 없었습니다. 그냥 접착제로 붙여놓은 뒷판이 떨어지는 것 뿐이었고요. 아무리 접착제 마감이 후지다고 해도, 또 아무리 제가 막 썼다고 해도 저혼자 뒷판이 열리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뒷판을 꾹꾹 눌러 더이상 뜨지 않도록 해서 사용하다가 어느 날 뒷판이 내부의 뭔가에 걸려서 더이상 닫히지 않았고 이참에 뒷판을 그냥 잡아 뜯어봤습니다. 고맙게도 아이패드나 아이폰처럼 뒷판에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어 부주의하게 뜯다가 망가뜨릴 위험은 없었습니다. 뒷판 전체가 아무 문제 없이 그냥 뜯겼습니다.

뜯어보니 원인은 안에 들어있던 자석이었습니다. 아이패드처럼 케이스를 편하게 붙였다 땠다 할 수 있게 안에 자석이 들어있습니다. 이 자석이 오랫동안 케이스에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접착제로 마감된 뒷판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어느 날 더이상 견디지 못한 뒷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자석 역시 접착제로 붙어있었는데 자석의 접착제가 떨어지자 자석이 내부에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움직임에 따라 뒷판의 접착력 역시 감소해서 뒷판이 뜯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뒷판을 아예 뜯어내자 자석이 자리에서 튀어올라왔습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이 기계는 서서히 교체주기에 다다르고 있었고 서비스센터에 들고갈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배터리는 멀쩡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석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놓은 다음 뒷판을 그 위에 잘 얹고 테이프로 붙여버렸습니다. 어차피 접착제 마감이나 테이프 마감이나 원리는 똑같았습니다. 다만 보기에 더 나쁠 뿐이었고요. 다시 비슷한 문제가 생기면 테이프를 다 떼내고 새로 붙이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마 남 보여주기 부끄럽게 생긴 갤럭시탭이 탄생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기계들이 접착제로 마감해 아이픽싯에서 리페어빌리티 스코어 3점 이하를 받는 상황이 썩 달갑지 않습니다. 내가 기계를 열어볼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요. 마이크로소프트는 서피스북을 리페어빌리티 스코어를 0점에서 5점대까지 끌어올렸고 델은 멋진 윈도우 랩탑을 만들면서도 이보다 리페어빌리티 스코어가 더 높습니다, 애플과 삼성은 여전히 이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특히 애플은 멀쩡한 랩탑마저도 점점 더 뜯어봐야 의미 없도록 만들고 있고요. 이번에 갤럭시탭 뒷판이 떨어지는 문제를 겪고 보니 아무리 내가 뜯어서 할 일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런 자잘한 문제상황에 서비스센터까지 가서 문제를 해결할 일이 안 생기는 기계 설계를 더 지지해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