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펜, 좋은 펜, 이상한 펜

거의 모든 글을 키보드로 타이핑하지만 손으로 글을 쓰며 생각하는 습관 때문에 지금도 어떤 글은 노트와 펜을 사용합니다. 다만 이렇게 손으로 글을 많이 써야 하는 상황이라 오래 전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노트를 써 왔습니다. 대략 8년 전에 처음으로 노트를 쓸 때는 아이패드에 두꺼운 터치펜으로 시작했습니다만 중간에 슬레이트PC, 서피스 프로, 갤럭시탭, 아이패드프로를 거쳐 지금은 갤럭시탭과 아이패드프로를 핵심 필기환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와콤 환경과 서피스 환경, 그리고 애플 환경을 사용해봤는데 (중간에 포고커넥트나 53펜슬 같은 제품을 사용했었지만 여기서는 생략.) 서피스와 애플은 처음부터 전원을 요구하는 펜 시스템을 사용한데 비해 와콤은 더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처음부터 이들만큼 훌륭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슬레이트PC 시대의 S펜은 당시에 사용하던 아이패드와 두꺼운 터치펜에 비하면 처음으로 '개인의 필체가 드러나는' 펜이었지만 지금와서 보면 그저그렇습니다.

지난 주에는 회의 끝나고 돌아오다가 실수로 갤럭시탭에 쓰는 S펜을 떨어뜨렸습니다. 디지털 펜 대부분이 그렇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고장납니다. 펜 심을 바꾸거나 캘리브레이션(와콤 펜만 해당)을 다시 해도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펜이 아예 동작하지 않으면 빨리 포기할텐데 동작은 합니다. 다만 오차가 커져 사용이 아주 어려워집니다. 갤럭시탭 S펜은 화면으로부터 전기를 유도해 펜 자체에 전원이 없어도 전원을 사용하는 다른 펜에 비할만한 반응속도와 정확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 와콤 기술의 한계로 화면 가장자리에 가까워질수록 오차가 커졌지만 이전 슬레이트PC 시대의 S펜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떨어뜨린 다음부터는 오차가 급격히 커지고 필압 단계가 감소합니다. S펜은 다행히도 애플펜슬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저렴해 바로 새 펜을 주문했습니다. 한번 떨어뜨린 S펜은 오차가 불규칙하게 나타나 더이상 필기하는데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책상을 뒤져 비상용으로 가져다 뒀던 슬레이트PC에 사용하던 구형 S펜을 꺼냈습니다. 다행히 같은 와콤 펜 계열이라서 그런지 갤럭시탭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갤럭시탭 펜에 비해 펜심이 더 두꺼웠습니다. 슬레이트PC용 S펜은 와콤 태블릿 펜심과 호환돼서 하드펠트심을 잔뜩 사놓고 사용했었습니다. 그때는 이 펜심이 그렇게 두껍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갤럭시탭 S펜 펜심은 훨씬 가늘었고 꽤 거슬렸습니다. 가장 곤란한 점은 이 펜이 전원을 사용하지 않아 화면에 항상 비슷한 수준의 오차가 생기는 점입니다. 내가 펜을 갖다 대는 지점으로부터 화면 중앙 기준으로 일관되게 {-0.5, 0.5} 정도의 오차가 일어났습니다. 원노트의 배경 노트 선에 맞춰서 필기하려면 이 오차를 사람이 알아서 보정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노트 선에 맞추질 못하고 삐뚤삐뚤하게 필기하며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한 시간 쯤 필기하자 내 뇌와 손이 알아서 오차를 보정해 오차가 있는 펜으로 노트 선에 맞춰서 필기할 수 있었고 그날 저녁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 상태가 별로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갤럭시탭 S펜이 고장났음을 인정한 직후 주문한 새 펜은 도착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이제 슬슬 평소보다 높은 필기 스트레스에 슬슬 곤란해질 무렵 도착했는데 이 펜은 좀 이상했습니다. 급하게 주문하면서 벌크라고 되어 있는 제품을 샀는데 이전 S펜과 모양과 크기는 똑같았지만 갈고리현상이 심했고 바닥에 떨어뜨려 고장난 S펜보다 오차가 더 심했습니다. 오차가 일정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게다가 필압이 동작하지 않았고요. 그대로 어떻게든 한시간쯤 펜을 쓰다가 이건 뭔가 완전히 잘못됐음을 깨달았고 아무래도 삼성전자 매장에 가서 펜을 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삼성전자 매장에서 이 펜을 판매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주변을 검색해보니 의외로 펜을 판매하는 삼성전자 매장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삼성전자 매장에 가지 못했고 아직까지 슬레이트PC에 사용하던 구형 '나쁜 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피스 펜이나 애플펜슬은 처음부터 전원을 사용해 이런 자잘한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떨어뜨리면 똑같이 고장나고 훨씬 더 무겁고 비쌉니다. 반면 와콤 펜은 역사가 깊어 여러 시대에 따라 펜 특성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전에 슬레이트PC S펜은 그땐 괜않았지만 지금 시대에는 나쁩니다. 일관된 입력 오차는 화면 가장자리로 갈수록 심해져 화면 끝부분에서는 2-4밀리미터에 이릅니다. 이건 이제 '나쁜 펜'입니다. 갤럭시탭S펜은 펜 자체에 배터리를 내장하지는 않았지만 화면으로부터 전기를 유도해 서피스펜이나 애플펜슬만큼 오차가 작고 일관됩니다. 물론 가장자리로 가면 좌표 오차와 필압 오차가 생기지만 필기에는 봐줄만한 수준입니다. 이건 지금도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좋은 펜'입니다. 쿠팡의 어느 판매자로부터 급하게 구입한 겉모양은 '좋은 펜'과 똑같이 생긴 벌크 펜은 '이상한 펜'입니다. 이건 어디서 생산했는지도 모르겠고 테스트를 하기는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펜은 와콤 펜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심각한 갈고리현상과 필압기능 없음, 그리고 일관되지 않은 좌표 오차로 정상적인 필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주말에는 어디든 큰 삼성전자 매장에 연락해본 다음 제대로 된 좋은 펜을 구입하러 가야겠습니다. 온라인에서 S펜을 구입할 때는 조심하세요. 이상한 펜을 사게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