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이체

하나은행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한국에 아이폰이 처음 출시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제 아주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고 또 이 기억을 확인해볼 생각도 없습니다만 주변에 있던 은행 중에 하나은행이 가장 먼저 아이폰 앱을 지원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때는 한국에 아이폰보다 먼저 출시된 아이팟 터치가 한국어 입력을 지원하지 않아 당시 널리 알려진 PDF익스플로잇을 사용해 탈옥하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서드퍼티 한국어입력기를 사용하게 된지 얼마 안 되던 시대라 무려 시중은행에서 아이폰 앱을 지원한다는데 열광하며 주거래은행을 바꿨습니다. 그렇게 하나은행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폰 앱을 지원하는 건 그 은행만의 특징이 아니게 됐습니다. 여느 시중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앱 이름을 여러번 바꿨고 앱 자체도 여러번 바뀌며 재설치를 요구했으며 재설치마다 모든 인증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인증에는 아이디, 패스워드 조합 뿐 아니라 공인인증서나 ARS, OTP인증도 포함되는데 이들을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더 적은 인터페이스를 통해 오밀조밀 입력하고 있으면 내가 은행 앱을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108단계 하청 개발자들이 하루에 2시간씩 졸며 대충 만든 앱의 쥐똥만한 버튼을 영원히 누르기를 반복하는 지옥에 떨어진 것인지 현실 구분이 잘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앱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온갖 기능과 온갖 광고판과 상품설명과 컴퓨터 모니터로 볼때는 현대적이고 깔끔하지만 모바일 화면으로 보면 시인성이 떨어지는 온갖 그래픽이 추가됐고 또 항상 바뀌는 앱 이름은 이게 과연 같은 은행의 인증된 앱이 맞는지 헛갈리게 만들었습니다. 가끔 은행 앱이 새로 바뀔 때 이게 그 은행에서 만든 앱이 아니라 은행 로그인 정보를 요구하는 가짜 앱일 가능성이 너무 높아보여 설치를 망설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요즘 세상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은행 앱을 대신할 수단이 꽤 생겨서 처음에는 주거래은행을 바꿀 결정을 하는 동기가 됐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곤 하는 은행 앱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던 몇 주 전 어느날 은행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 메시지는 은행 앱 푸시로 도착했는데 은행 앱을 실행하자 또 어쩜 그렇게 작은 글씨로 표시되는지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1년간 인터넷뱅킹을 사용하지 않아 조만간 인터넷뱅킹 사용이 정지될 거란 내용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내가 지난 1년간 사용해온 아이폰을 통한 이체거래들은 뭔가 싶었습니다만 이자들 기준의 인터넷뱅킹 사용이란 자신들이 108단계 하청을 거쳐 만든 그 사용할 때마다 분노게이지를 올리는 바로 그 바이너리 덩어리를 통한 이체거래라는 사실을 곧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그 은행과 계좌를 통해 정상 거래하고 또 인터넷뱅킹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자사 앱을 사용하지 않으면 인터넷뱅킹을 막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그 지옥같은 은행 앱을 실행했습니다. 사실은 같은 시도를 1주일 전에 했었는데 페이스아이디 로그인 설정이 사라져 아이디, 패스워드로 로그인해야 했고 패스워드는 당연히 전용 키보드로 입력해야 했는데 붙여넣기가 안되므로 제가 사용하는 패스워드 중 가장 짧고 위험한 문자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로그인에 성공해서 아무데나 1원이라도 이체하려고 보니 OTP기계가 필요했습니다. 거의 쓸 일이 없으므로 어디 구석에 잘 보관해둔 걸 꺼내다가 켜서 번호를 입력해보니 이번에는 시간오차가 커져서 은행에 방문하라는 메시지가 나타났습니다. 지난 1년간 멀쩡히 잘 사용하던 계좌와 인터넷뱅킹을 유지하기 위해 은행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은행에 가서 OTP를 보정하며 기왕 은행에 온 참에 제가 처한 인터넷뱅킹 거래정지 위기를 미리 해결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정지된 상태를 해소해줄 수는 있지만 아직 정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만간 찾아올 거래정지를 미리 해결해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은행 앱도 이제 사람들이 많이들 사용하는 여러 은행을 연동해서 사용하는 편리한 앱들처럼 사용할 수 있으나 한번 사용해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상당한 짜증을 잘 참으며 사회인 답게 뇌에 힘주고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만 행원님의 저 말을 듣는 순간 뇌에 힘이 빠져나가 “풉!”하고 터져버렸습니다. 한번 뇌에 힘이 빠져나가니 평정심을 잃고 행원님께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행원님은 본인 은행 앱을 사용해보셨나요?” 하지만 행원님은 저보다 더 강력한 사회인이었고 자신의 직업적 위치와 상황에 맞는 올바른 대답을 하시며 상황을 넘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오차를 보정한 OTP를 들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은행을 앱을 실행하기에는 그날 사용할 모든 MP를 사용한 후였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이윽고 주말이 되어 은행 앱을 실행하고 쥐똥만한 버튼을 틀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눌러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해 로그인했습니다. 그리고 OTP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김에 페이스아이디 로그인을 설정하려고 보니 이번에는 공인인증서 만료까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공인인증서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작은 버튼들을 누르고 ARS가 불러주는 두 글자짜리 버튼을 틀리지 않고 누른 다음 OTP를 입력해 무사히 공인인증서를 재발급받은 다음 다시 페이스아이디 로그인을 설정하기 위해 ARS가 불러주는 두 글자짜리 버튼을 누르고 OTP에 나온 숫자를 입력해 페이스아이디도 등록했습니다. 그 다음에 드디어 이번에는 하나은행 앱을 통한 '인터넷뱅킹 계좌이체'를 하기 위해 메뉴를 눌렀는데 여기 나타난 메뉴를 읽는 일은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이체 하위에는 다음 서브메뉴들이 있었습니다.

  • 계좌이체

  • 오픈뱅킹이체

  • 타은행 자금 하나로 모으기

  • 빠른이체

  • 심플이체

  • 큰글씨이체

  • 적금/신탁/청약/개인형IRP납부

  • 예약이체

  • 자동이체

  • 캐시넛보내기

  • 하나머니보내기

  • 착오송금 조회/반환

하나은행 아이폰 앱이 처음 생긴 그 시대부터 오랫동안 별 쓰레기같은 인터넷뱅킹 앱을 오랫동안 참으며 사용해온 덕분에 저 많은 메뉴 중에서 그냥 '계좌이체'를 선택하면 제가 원하는 '인터넷뱅킹 정지를 막기 위한 단 한 번의 이체거래'를 할 수 있음을 알고는 있습니다. 카카오뱅크 계좌로 1원을 송금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메뉴들이 너무나도 신경쓰였습니다. '오픈뱅킹이체'는 '계좌이체'와 어떻게 다를까요. '빠른이체'는 기존 '계좌이체'와 뭐가 다를까요. '빠른이체'와 '심플이체'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이체방법일까요. '큰글씨이체'는 기존 '계좌이체', '오픈뱅킹이제', '빠른이체', '심플이체' 중 어떤 이체거래를 대신하는 걸까요. '예약이체'와 '자동이체'는 서로 어떤 점이 다를까요. '하나머니'와 '캐시넛'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모을 수 있으며 이들을 각각 어디의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보낸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착오송금' 관련 메뉴는 왜 '이체'의 하위에 있는 것일까요. 또 적금납부 메뉴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은행 앱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심지어는 더 보기에 나쁜 모바일 게임 UI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이 메뉴는 똑같은 아이템 성장에 관련된 모든 기능을 한 메뉴 레벨에 맥락 없이 늘어놓은 느낌이었습니다. 굳이 옮겨보면 '아이템 강화, 제련, 한계돌파, 계승'같은 기능들이 한번에 나타나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후자는 메뉴 디자인을 게임에 익숙하고 모든 기능을 이해하며 시시각각 필요애 따라 각 기능에 능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객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달리 이야기하면 메뉴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하기 때문입니다. 저 처참한 이체 메뉴 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 많은 어려움 끝에 카카오뱅크 계좌로 1원을 송금했고 다음 1년 동안은 이 지옥같은 하나은행 앱을 다시 볼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또 1년 뒤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일을 반복해 또 1원을 송금할 계획입니다. 지금 세운 계획과 달리 1년 뒤에는 하나은행 앱이 없어지고 이번에는 앱스토어에서 새로운 하나은행 앱을 찾아 설치한 다음 이 앱이 내 금융거래정보를 파밍하기 위한 가짜 앱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어 로그인 정보를 제시하는데 고민하게 될른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 잘못됐는지 이 수많은 잘못이 켜켜이 쌓인 고통스런 결과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이것과 함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내가 만드는 결과물의 기능 구성을 고민할 때 가끔은 저 지옥에서 돌아온 하나은행 이체메뉴를 떠올려볼 겁니다.